햇볕이 케네디 구했고, 비가 고어 버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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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4·27 재·보궐 선거 날이 밝았다. 기상청은 26일 최대 격전지인 강원, 경기 분당, 경남 김해에 비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 강원도의 경우 하루 종일, 분당은 오전, 김해는 새벽 한때다. 김회철 기상청 통보관은 “강원도 영동 지방의 경우 최고 30mm 정도의 비가 예상된다”며 “종일 나눠 내리는 비의 양이 이 정도라 선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때마다 날씨가 화제다. “날씨에 따라 투표율이 달라지고, 투표율에 따라 각 당의 득표율이 달라진다”는 통설 때문이다. 과연 근거가 있는 얘기일까.


“三十일 서울 시내의 투표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열성껏 투표장에 나와 투표를 하고 있는데 이날 정오까지 서울시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서울 시내 四백五十三 투표소에서 투표를 한 총유권자 수는 七十 퍼센트로 이날 하오 五시까지는 백 퍼센트에 가까운 좋은 성적을 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1950년 5월 30일, 한 석간신문에 실린 기사다. 한국에 선거제도가 본격적으로 뿌리 내리기 시작하던 때부터 투표일 날씨가 화제가 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날 전국의 최종 투표율은 91.9%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60년. 선거와 날씨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내 사례는 아직까지도 찾아보기 힘들다. 막연히 ‘투표율이 낮으면 여당이, 높으면 야당이 유리하다’는 얘기가 정가에 떠돌 뿐이다. 최근 일각에서 “속설일 뿐 현실과는 무관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5년간 국회의원 재·보선 결과만 놓고 봐도 그렇다. 평균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24.8%) 2006년 7월 선거 땐 전 선거구(서울·부천·마산)에 4~65mm의 비가 왔고,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40.8%) 2009년 4월 선거 땐 전 선거구(인천·울산·전주·경주)가 화창했다. 하지만 두 선거 때 모두 각각 여당이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전패(全敗)했다. 날씨가 투표율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긴 하지만, 선거 승패까지 좌우한다고 보긴 힘든 결과다.

 일본의 경우엔 날씨가 궂을 때 오히려 투표율이 높았다. 일본기상협회에 따르면 1947년부터 지난해까지 도쿄 지역에서 치러진 참의원 선거 가운데 투표율이 50%를 넘은 경우가 17번 있었다. 이 중 선거 날 비가 온 경우가 여덟 번이었다. 반면 날씨가 맑았던 날은 네 차례에 불과했다.


 ◆미국선 60년대부터 연구=한국·일본과 달리 미국의 경우 일찍부터 날씨와 선거 결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진행돼 왔다. 상대적으로 선거의 역사가 길고 국토가 넓어 지역에 따라 날씨 차이가 많이 나는 탓이다.

 뉴욕의 신문들은 이미 19세기부터 독자들에게 상세한 선거일 날씨 기사를 제공했다(데이비드 러들럼, 『날씨 요인(Weather Factor)』). 196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인 학술 논문이 등장했다. 80~90년대엔 정치학자는 물론 경제학자·기상학자들까지 ‘날씨와 선거’ 연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제각각이었다. 통설대로 날씨가 나쁘면 투표율이 떨어진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스테펀 내크, 1994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분석도 있다(제이 개트럴, 그레고리 빌리, 2002년)

 날씨로 인한 투표율 하락이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리퍼블리칸 블루(republican blue)’와 ‘공화당원들은 비가 오길 기도해야 한다(Republicans should pray for rain)’란 관용구가 낮은 투표율을 다르게 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다.

 ‘리퍼블리칸 블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을 가리킨다. 통상 ‘날씨가 좋아 공화당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맥락으로 쓰인다. 40년대 민주당의 주 지지층인 서·남부의 저소득 농민들이 날씨가 좋으면 투표를 포기하고 놀러 가거나 농사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선거 날 맑으면 민주당이 불리하다’는 얘기가 퍼졌다.

 반면 ‘공화당원들은 비가 오길 기도해야 한다’는 ‘선거 날 비가 오면 민주당에 불리하다’고 해석한 경우다. 저소득층은 자가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선거 날 비가 오면 멀리 떨어진 투표장까지 우산을 받치고 걷거나 만원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이런 불편 탓에 날이 궂으면 저소득층 지지자가 많은 민주당이 불리하다는 논리다.

 ◆“1960·2000년 미 대선 승자 바뀌었을 수도”=현재까지 나온 가장 광범위한 연구 결과는 2007년 브래드 고메즈 플로리다 주립대 교수(당시 조지아대 객원 교수)가 『정치학 저널(The Journal of Politics)』에 발표한 논문이다.

 고메즈는 1948~2000년 치러진 14차례 미 대선에서 날씨와 선거의 상관 관계를 분석했다. 기존 연구들이 몇몇 주 단위 분석에 그쳤던 데 비해, 그는 미 전역 3115개 카운티의 선거 자료와 2000곳 이상의 기상 관측소 날씨 정보를 종합했다. 날씨 외에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변수(유권자의 학력·소득 수준, 인종, 주지사·상원의원 선거가 같은 날 치러졌는지 여부 등)는 상관 계수 모델을 만들어 통제했다. 이어 이전 대선 때 지지율 변화 추이를 근거로 민주·공화 우세지역을 분류한 뒤 날씨와 투표율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결론은 ‘선거 날 날씨가 나쁘면 투표율이 떨어지고, 공화당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민주당 지지 계층인 저소득층이 궂은 날씨에 이동하는 불편 때문에 투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메즈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선거 당일 눈·비가 평년치보다 1인치(2.5㎝) 더 올 경우 투표율이 각각 0.5%P, 0.9%P 떨어지고, 이는 공화당 후보의 득표율 상승(각각 0.6%P와 2.5%P)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고메즈는 이를 토대로 1960년 미 대선 때 눈·비가 많이 왔었다면, 제 35대 대통령은 민주당 케네디(John F. Kennedy)가 아니라 공화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닉슨은 이 해 선거에서 21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303명을 얻은 케네디에 74명 차이로 졌다. 하지만 선거일 날씨가 나빴다면 델라웨어·일리노이 등 7개 주에서 총 106명의 선거인단을 추가로 얻어 거꾸로 승리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2000년 대선은 정반대 경우다. 고메즈는 승부의 분수령이 된 플로리다 주에 비가 한 방울도 안 왔더라면, 민주당 고어(Al Gore)가 43대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고어는 불과 수백 표 차로 플로리다 주의 선거인단 25명을 공화당 부시(George W. Bush)에게 뺏겼다. 최종 개표 결과 두 사람이 확보한 선거인단 숫자는 5명 차이였다.

김한별 기자

◆2000년 미국 대선=민주당 고어 후보가 전체 득표 수에선 앞섰지만 선거인단 숫자에서 뒤져 공화당 부시 후보에게 패했다. 주별로 다득표자가 해당 주의 선거인단 전체를 독식하는 ‘승자 독식’제도 때문이다. 플로리다주의 경우 개표 과정에서 1만4000여 개의 무효표가 나왔지만, 연방대법원이 수작업 재개표를 막아 부시가 승리했다. 이 ‘플로리다에서의 승리’ 덕에 부시는 투표 35일 만에 대통령 당선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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