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한국사 필수’, 절반의 성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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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989년 11월 9일.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세상을 둘로 나누던 냉전은 끝났다. 다시 하나가 된 지구마을의 시대에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와 민주화를 기치로 내걸고 권위주의 체제의 유산을 털어내려 했다. 국책 과목이었던 국사는 국민윤리와 교련과 함께 도매금으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95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필수였던 한국사 교육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로 축소됐다. 세계화 진전과 함께 L과 R을 원어민처럼 발음하게 하려고 아이들의 혀 밑을 끊는 수술도 불사하는 영어 조기교육의 광풍이 몰아쳤다. 한자 교육은 폐기됐고 아이들은 한자 앞에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전락했다. 뜻 모를 한자어로 가득한 국사책은 앞서 산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고 문화와 전통을 남겼는지를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수능시험에서 선택 비율이 10%가 안 될 만큼 국사는 기피 과목이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부터 근현대사 교과서 검정이 촉발한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세간의 관심과는 반대로 한국사 교육이 등한시되는 역설을 빚었다. 그 결과 상감청자를 “상감마마가 쓰는 청자”로 알고, 3·1운동을 “삼쩜일 운동”으로 읽는 소극(笑劇)이 대학 강의실에서도 벌어지는 ‘역사 문맹’의 보편화 현상이 초래됐다.

 전근대 역사를 포함한 모든 역사는 당대사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의 역사는 오늘 우리를 있게 한 토대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누리는 물적 풍요와 다원적 시민사회는 그네들의 피와 땀이 씨앗이 돼 거둔 결실이다. 그들의 시대를 모르고 우리 시대의 앞길을 열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2009년 개편한 9차 교육과정에서 고교 한국사를 근현대사 위주로 재편한 것은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검정을 통과한 새 교과서도 대한민국의 빛과 어두움과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끈 이들의 공과를 균형 있게 서술하지 못했다는 세평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실용을 내건 현 정부는 입시 부담 축소를 명분으로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격하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한국사, 필수과목으로 하자”를 신년 기획 어젠다로 내건 중앙일보는 올해 1월 무국적 교육과 자긍의 순기능이 결여된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알리는 목탁이 되길 자임했다. 작은 울림은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점점 큰 동심원을 그리며 각계각층 시민사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궤적을 그렸고, 3개월 만에 정부도 그 울림에 호응했다. 4월 22일 정부는 내년부터 한국사를 고등학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교과목으로 되살리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아직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반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글로벌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의 젊은이들을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유목민으로 길러야 한다. 그러나 태어난 강물을 기억해 회귀하는 연어와 같은 인재들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 내일은 없다. 프랑스와 독일, 미국 등 세계 모든 나라가 자국사 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는 산란장소를 잊지 않고 모천(母川)으로 돌아오게 하는 정체성을 국민에게 심어 주기 때문일 터다. 진정한 정체성은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자긍과 성찰에서 나온다. 대한민국이 이룬 기적 같은 성취에 대한 자긍과 그 과정에서 빚어진 과오에 대한 성찰이 균형 있게 서술된 교과서 만들기가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아울러 아무리 잘 만들어진 교과서라도 학습자에게 그림의 떡이어서는 곤란하다. 한국사 교과서에 한자 병기와 더불어 한자 교육이 병행돼야 한국사가 고리타분한 암기과목이 아니라 글로벌시대를 헤쳐 나갈 지혜와 교훈을 주는 지적 경쟁력 있는 과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