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현대차 정규직과 비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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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현대자동차 노조가 붉은 머리띠에 정치투쟁만 일삼는 과격 집단이라 생각하면 오해다. 노조가 얼마나 조합원을 살뜰하게 챙기는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데다. 현대차 노조는 500개의 시범화장실에 비데 설치를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물론 비데까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진 않는다. 다만 회사 측은 “정규직 대부분이 집에서 비데를 쓰고 있고, 나이가 들면서 기존 화장실이 불편하다는 불평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노조의 요구로 체육관과 문화회관의 바닥을 우레탄에서 고급 나무로 바꾸기로 했다. 올해는 여름철 빙과류를 제공하는 기간을 보름에서 40일간으로 늘렸다. 자녀들의 학자금 지원은 대안학교를 포함해 사이버 대학까지 확대된다. 이렇게 세심한 곳까지 보살피는 노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회사가 제안을 거부한 적도 있다. 휴게실에도 유선TV를 놓아달라는 요구에 사측은 “근무시간 중 TV를 보는 것은 부작용이 많다”며 난색을 표했다.

 지난해 현대차 순이익은 5조원이 넘었다. 두 해 연속 엄청난 성과급 잔치를 벌였고, 명절에는 귀향비 80만원에다 사이버머니까지 듬뿍 나눠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사 잘하는 기업이 자기 종업원을 잘 챙긴다고 뭐라 할 수 없다. 펑펑 윤활유가 도니 노사관계도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다만 금융위기 때 쓸데없이 정부가 난리 핀 게 난감해졌다. 이런 부자기업에 개별소비세와 노후차량 취·등록세까지 깎아줘 차량 한 대당 75만~250만원의 판매 보조금을 지원한 게 우스운 꼴이 돼 버렸다.

 현대차 노조의 정규직을 향한 애정의 결정판은 일자리 세습이다. 노조는 “회사 발전에 기여한 만큼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현재 58세인 정년도 60세로 연장하라고 야단이다. 이에 대해 “현대판 음서제(蔭敍制:고관의 자식을 과거 없이 관리에 등용하는 제도)”라느니 “부모 잘 만나야 정규직 되는 거냐”는 비난이 거세다. 한편에선 신중한 분석도 있다. 앞서 똑같은 단체협약을 맺은 현대중공업·SK에너지 등은 “그 이후 대규모 채용이 없어 실제로 직원 가족 우대를 적용한 사례는 없다”고 해명했다. 현대차도 7년간 생산현장의 정규직을 공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사측은 “현재도 정규직의 15% 정도가 유휴(遊休)인력”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대차가 이미 “올해부터 정년퇴직으로 인한 공백을 신규 채용으로 메워야 한다”는 노조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현재 평균 43세인 현대차 정규직 조합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자리 세습을 집요하게 밀어붙일 게 분명하다. 한때 민주노총 주력부대였던 서울지하철 노조도 똑같은 길을 밟았다.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다만 중년에 접어든 현대차 노조가 지하철 노조처럼 정치투쟁에서 복지로 과녁을 확 바꿀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현대차 노사가 일자리 세습을 어떻게 요리할지는 그들의 자유다. 다른 기업의 선례도 있는 만큼 강제로 막을 사안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똑같은 논리라면 우리 사회는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30년 이상 국민 건강에 이바지한 의사의 자녀에겐 당연히 의사면허를 내줘야 한다. 판사 또한 장기간 재판에 기여했으니 자식들을 판사로 우선 채용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헌법에 5년 단임이 못박힌 대통령 자리라도 세습 안 되는 게 다행이다. 딸을 특채했다가 목이 떨어진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만 억울하게 울고 갈 판이다.

 일자리 세습에 “노조의 근본 정신이 차별 철폐가 아니냐”며 비난할 자신이 없다. 필자는 솔직히 “챙길 수 있을 때 챙기고 보자”는 현대차 노조의 이기주의와 정규직의 막강한 파워가 부러울 따름이다. 중앙일보에도 노조가 있지만 화장실엔 비데가 없다. 필자가 몸 담은 24년 동안 기자의 아들이 기자로 우선 채용된 경우도 보지 못했다. 정반대로 현대차 노조는 “우리가 세계 일류기업을 만들었다”며 당당하게 큰 소리 치고 있다. 이제라도 전국의 모든 노조들이 현대차 노조를 따라 배워 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가? 세상 정말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