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전! 창업 스토리 [1] 이범형 이지매트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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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2006 이범형 회장은 1994년 백산OPC를 창업하기도 했다. 사진은 백산OPC 사장 시절 본지와 인터뷰하면서 프린터 드럼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고용 없는 성장. 최근 우리 경제의 최대 고민거리다. 정부도 일자리 늘리기를 제1과제로 삼고 있지만 개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줄이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탓이다. 돌파구는 오직 하나, 창업이다. 모두 알지만 실천은 어렵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도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 오늘날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대기업도 모두 작은 도전으로 출발했다. 온갖 난관을 뚫고 기업을 일으킨 창업 영웅들. 그들의 열정과 노하우를 배운다.

“움직일 수 있으면 일을 해야 해요. 일 안 하는 친구들은 다 고부라졌는데 난 이렇게 꼿꼿하잖아요.”

 침구업체 이지매트의 이범형(78) 회장은 늦깎이 창업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 서초동 이지매트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그는 ‘실버 창업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그는 2년 전 76세에 충북 음성에서 자본금 5억원으로 창업했다. 이에 앞서 61세 때인 1994년에도 충북 진천에 기업을 세운 바 있다. 프린터·복사기의 핵심부품인 드럼의 국산화를 이뤄낸 백산OPC다. 지난해 6월 그는 부회장으로 있던 백산OPC를 떠나 요즘은 새 기업 키우기에 전념하고 있다.

 이 회장은 육군 중령 출신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육군보병학교에 들어가 6개월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해 수많은 격전을 치렀다. 전쟁이 끝난 뒤엔 미국 육군보병학교와 병참학교에 잇따라 연수를 다녀왔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군에서 잘나가던 그는 1974년 방위산업체인 삼선공업의 임원으로 변신했다. 중령 월급으론 1남3녀의 교육비를 대기 힘들어서였단다. 삼선공업은 포탄 신관과 소총 몸체 등의 소재로 쓰이는 알루미늄 합금을 만드는 업체였다. 이후 동종업체 사장에 스카우트돼 93년 퇴임할 때까지 그는 20년 가까이 알루미늄 업체에서만 일했다. 이 경험이 그의 창업 밑천이 됐다.

2011 이범형 회장이 폴리에틸렌으로 만든 매트리스 신소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그의 첫 창업은 고용 사장 퇴임 전 일본 친구가 드럼을 보여주면서 개발해 보라고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알루미늄 물성만큼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기에 알루미늄 통에 코팅액을 입히는 게 뭐 어려우랴 싶었다. 당시 드럼은 미국과 일본 등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는 한정밀공업(백산OPC의 전신)을 세운 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관련 자료를 구해 공부했다. 하지만 개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용도가 다른 제품마다 코팅액을 달리 써야 하는 데다 내구성을 높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창업 이듬해 자금난 스트레스로 두 차례 뇌경색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군 후배의 출자를 받아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이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그는 격전을 치른 용사답게 97년 드디어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만큼 미국·일본 등 해외 시장이 하나 둘 열렸다. 덕분에 회사는 반석에 올라 2002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하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멈출 줄 몰랐다.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버릴 수 없었다. 한때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여름에도 습기가 차지 않아 언제나 편하게 잘 수 있는 소재가 없을까’ 고민하던 게 창업으로 이어졌다.

 “폴리에틸렌을 실처럼 뽑아 이리저리 꼬면 솜이나 스펀지를 대체할 거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꼬임의 정도에 따라 푹신함이 다른 매트리스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알루미늄 압출 공정을 응용한 겁니다.”

 그는 5년 전 백산OPC 거래처인 일본 업체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지분도 출자해 신소재 개발에 나섰다. 신소재 개발이 끝나자 이지매트를 세워 침구류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신소재 제조법은 미국·일본에서 특허를 받았다.

 “지난해 말 폴리프로필렌 소재의 매트리스잇·베갯잇까지 개발함으로써 완벽한 제품 구색을 갖추게 됐습니다. 이지매트 침구류는 통기성이 좋아 물로 빨아도 금방 마릅니다. 진드기나 곰팡이의 서식을 막을 수 있는 기능성 제품이죠.”

 이지매트는 국내 유명 침구업체인 이브자리와 4월 초 첫 납품 계약을 했다. 이와 함께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과 수출 상담도 진행 중이다. 이 회장은 앞으로 신소재가 자동차·고속철도 시트와 안전 펜스 등에 두루 활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해 매출목표는 60억원. 조만간 자본금을 30억원으로 늘리고, 5년 뒤엔 300억원 매출을 올려 코스닥에 상장한다는 게 그의 중장기 목표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이를 뒷받침할 건강, 두 가지만 갖추면 나이는 상관없이 누구나 창업할 수 있어요. 여기에 독보적으로 잘할 수 있는 아이템만 찾으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죠.” 이 회장이 들려준 창업 비결은 특별할 게 없다. 다만 실천이 문제일 뿐이다.

글=차진용 산업선임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 이범형 회장이 걸어온 창업의 길

-1933년 2월 서울생. 인천 제물포고 졸업
-51년 8월 육군보병학교 입교, 소대장으로 한국전쟁 참전

-68~69년 베트남 파병
-74년 중령 제대 후 삼선공업 이사로 입사

-94년 한정밀공업(현 백산OPC) 창업
-2009년 7월 이지매트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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