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단거리패, 정치극 < 일식 >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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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이윤택씨가 새로운 형태의 정치극을 내놓았다.

연초에 선보인 작품은 < 일출 >. 이씨가 대표로 있는 연희단거리패는 전통의 굿을 현대적 공연기호로 개발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 일출 >은 문화관광부의 전통연희 개발작품 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연희단거리패가 굿을 연극의 텍스트로 활용한 것은 < 산씻김 >< 오구 >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 우리 굿 양식 중 연극적 요소가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경기도 도당굿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전통과 미래가 만나는 우리의 연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문득 해가 사라진 세상에 불을 다시 켜기 위해 출동한 전기수리공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수리공은 도입부를 제공할뿐 아니라 극중에 나오는 역사인물들과 논쟁하는 등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는 고장난 가로등을 켜나가다 100년 전의 시대상황과 만나고 이 과정에서 고종과 전봉준 등 시대적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역사인물과 대화하면서 정체성 상실의 원인을 캔다.

작품의 미덕은 과거와 현재의 인물이 만남으로써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 정치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연출가 이씨는 '만연한 정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정치와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만나는 방법을 모색코자 했다'고 들려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기수리공이 아관파천중인 고종을 거리에서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전기수리공은 일식으로 상징되는 국권상실(또는 정체성) 위기의 책임을 묻고, 고종은 자신의 무력함을 호소한 뒤 쓰러진다. 그러자 수리공은 고종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

고종과 전봉준, 전기수리공의 대화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전봉준은 도망가는 고종의 행차를 막아선채 그의 행선지를 추궁하며, 수리공은 이들 사이에 끼어 논쟁과 화해를 이끌어낸다.

특히 전봉준은 처형에 앞서 '너희들 몇이 힘쓴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어. 지금은 내 모가지가 걸릴 때여. 내 모가지가 걸려서 새로 뜨는 해를 보게 되어 있어'라며 역사의 냉엄한 이치를 설파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허무주의를 털고 서로 껴안으며 새 세기를 맞자는 메시지를 내밀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가(歌).무(舞).악(樂)이 어우러지고, 춤과 가면, 노래, 비나리조 사설대사가 종합되며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총체극이다. 출연진은 실질적 주인공인 궁녀 유실이의 임선애씨를 비롯해 전기수리공 김병춘씨, 고종 조영진씨, 화랭이 영감 김응수씨, 삼각산 무녀 정동숙씨 등.

연희단거리패는 이 작품을 4일부터 6일까지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먼저 공연한 뒤 21일부터 30일까지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문의 02-763-1268. [서울=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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