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댁 '도티란앵'의 서울적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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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 5년차인 도티란앵(29)씨는 2006년 6월 베트남에서 친구의 소개로 남편 서정현(39)씨를 만났다. 결혼을 하고 한국에 왔지만, 2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낯선 환경, 어려운 한국말이 그녀를 겁에 질리게 했다. “서울은 너무 복잡했어요. 지하철도 못 탔어요. 어느 쪽으로 타야하는지 몰랐죠.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지리를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친정엄마가 보고 싶어 매일 전화를 하고 울었어요."

그녀의 한국생활은 서울 동대문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뀌어갔다. "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체험을 했어요. 말 좀 익숙해지면서 어려워만 보였던 지하철 타는 것이 왜 그렇게 쉽게 느껴지던지…."

그녀는 하루 5시간을 자며 공부에 매달렸다. "어디를 가든지 사전을 꼭 가지고 다녔어요." 그녀의 한국어 사전은 손때가 까맣게 묻어있다. 남편의 한국어·베트남어 사전도 손때가 묻었다. 서로 사전에서 낱말을 찾아 공책에 썼다. '공책대화'는 시부모도 같이 했다. 이젠 능숙해진 한국어로 시장에서 물건도 잘 깎는다. 안 깎아주면 덤이라도 달라고 우긴다고 한다.

2009년 11월에는 도티란앵씨에게 주민등록증이 생겼다. 시부모는 "막내 며느리가 드디어 한국 사람이 됐다"고 기뻐했다. 한국인이 된 도티란앵씨는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1년에 한번 해남 진도의 제사에 간다. 그 곳에서는 50명의 친척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어르신들이 내가 웃는 모습이 귀엽다며 용돈을 주셨어요. 이젠 딸 하늘이에게 용돈이 갑니다.” 그녀는 시골에 한번 다녀오면 20만원의 용돈이 생긴다고 말했다. 시골에 가는 차비나 제사비용은 다 시부모가 부담한다. 그녀는 용돈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자주 제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웃는다.

그녀는 올 2월부터 다문화센터에서 통역과 다문화 가정 상담역을 맡았다. 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한 달에 100만원을 받는다. 외국인 상담 콜센터에 이어 두 번째 직장이다.

한국 생활 5년차, 한국어 한 마디 몰랐던 그녀는 다문화센터에서 '도티란앵 선생님'이라 불린다.

김정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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