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반환 드라마 … 시작은 박병선, 마무리는 사르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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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함대가 병인양요(1866년) 때 강화도의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조선왕실 의궤 중 75권이 14일 145년의 유랑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환된다. 프랑스에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지 36년, 반환 협상이 시작된 지 20년 만의 일이다. 프랑스 해군의 보고서에는 외규장각에서 총 340권의 도서를 가져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중 296권은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 보관돼 왔고, 한 권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있다. 또 한 권은 1993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방한 때 한국으로 전달됐다. 나머지 42권은 행방불명 상태다.

왼쪽 도서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1624~1688)의 국장을 기록한 ‘장렬왕후 국장도감 의궤’(1688)상권. 프랑스국립도서관에만 있는 유일본이다. 2005년 한국과 프랑스 양국 합작으로 디지털 영인본을 만들었다. [문화재청 제공]<사진크게보기>


 BNF의 외규장각 도서들이 한국으로 귀환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반환을 요구하는 한국에 프랑스가 등가등량(같은 가치와 같은 양)의 원칙에 따른 문화재 맞교환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협상은 지난해 11월 한·프랑스 정상회담에서 5년마다 임대 계약을 갱신하는 대여로 타결됐다. 한국 정부는 “형식은 대여지만 프랑스가 이를 돌려달라고 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실상의 반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년간 교착 상태였던 협상의 물꼬는 지난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터지기 시작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도서들을 돌려받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지가 발동된 것이었다. 한국은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개최국이고, 프랑스는 올해 G20 회의의 의장국이다. 정부는 방한을 앞둔, 그리고 G20 회의에서의 한국의 협조가 절실한 사르코지 대통령이 한국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 정부 관리는 당시 “100년 만에 한 번 찾아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말했다.

 외규장각 도서가 귀환길에 오르기까지에는 여러 인물의 활약이 있었다. 우선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83)씨의 공이 컸다. 박씨는 75년 프랑스에 외규장각 도서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뒤 한국 정부에 도서 반환 협상을 촉구했다. 외규장각 도서들이 한국으로 떠난 13일 박씨는 “생전에 이런 날을 맞이하게 돼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가 협상을 통해 대여가 아니라 반환으로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봄부터 본격적인 협상을 벌여온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의 박흥신(57) 대사와 협상 실무책임자인 유복렬(48) 참사관은 프랑스의 양보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들은 문화재 상호 대여를 주장하는 프랑스 외교부를 설득해 한국 문화재의 대여를 전제로 하지 않은 ‘일방적 대여’라는 협상안을 관철시켰다.

 프랑스 측에도 한국의 우군이 있었다. 친한파 정치인 자크 랑(71) 하원의원이 그중 한 명이다. 문화부 장관 출신인 랑 의원은 “프랑스는 우정을 존중하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라”며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랑 의원은 그 공을 사르코지 대통령에게로 돌렸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와 BNF 등의 반대 때문에 망설이던 사르코지 대통령이 도서들을 한국에 보내겠다는 결심을 한 뒤 정부 내의 반대론자들을 불러 직접 설득작업을 벌였다”고 말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 문화재에 대한 대여 요구 없이 외규장각 도서의 한국 대여를 약속했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외규장각 도서=조선 왕실의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1007종 5067책의 서적과 문서를 일컫는다. 정조는 1782년 왕실 소장 장서를 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도 나눠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규장각의 별관인 외규장각을 세웠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340권을 빼돌린 뒤 나머지는 소실됐다. 도서들은 조선 왕실의 중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儀軌)로, 임금의 열람을 위해 최고급 소재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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