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디 포스터와 심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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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포스터는 대단한 여배우다. 〈피고인〉과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번이나 받았으며 요즘에는 감독과 제작자로도 큰 명성을 얻고 있다.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남자로부터 정자를 공급받아 인공수정으로 임신한 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여자의 행복은 결혼이나 남자와의 동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소 전투성이 느껴지긴 하지만.

조디 포스터는 최근 〈애나 앤 더 킹〉이란 새영화에 출연했다. 율 브린너와 데보라 카가 출연했던 <왕과 나>의 리메이크작이다. 조디 포스터의 상대역은 홍콩 출신의 주윤발. 할리우드의 가장 지적인 여배우라는 사람이 극도의 오리엔탈리즘이 배어있는 <애나 앤 더 킹>같은 영화에 출연한 게 다소 뜻밖이긴 하다. 이 영화는 여전히 무대가 되는 태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고 있다. 율 브린너 시절인 1956년에도 그랬다.

자기의 체질에 맞는 영화에 출연했건 아니건, 조디 포스터가 필자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각종 매체에 나와서 영화 프로모션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CNN의 간판 프로그램인 〈래리 킹 라이브쇼〉에 나온 조디 포스터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할리우드 배우에게서는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조디 포스터만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는 영화에 출연한 이상, 개봉 이후 어느 기간까지는 영화 홍보와 마케팅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있는 것 같다. 아니면 아예 계약조건에 들어가 있거나. 평소 언론과의 관계에서 트러블이 많은 배우 - 브루스 윌리스라든가 숀 펜같은 - 라도 영화개봉을 앞두고는 진지하게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이른바 "잘 나간다"는 배우들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문제는 이들이 인터뷰를 거부하는 방식이 거의 병적이라는 데에 있다. 국내에 있는 모든 언론이 파파라치인가?

〈텔 미썸딩〉의 개봉을 앞두고, 혹은 상영기간 도중, 우리나라의 일류급(개런티 면에서) 배우라는 한석규씨와 심은하씨는 거의 모든 인터뷰를 사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해피엔드〉 의 여주인공 전도연씨 역시 일부 연예전문 일간지에서 선정적인 기사가 나간 후 거의 모든 매체와의 접촉을 끊었다. 대중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시점에 언론들은 오히려 이들을 만나기가 힘이 들었다. 이들 영화의 홍보를 담당했던 해당 영화사나 홍보전문 기획사에서는 기자들의 불만을 달래기에 급급했다. 배우들을 설득해서 인터뷰에 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론을 무마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아무래도 일이 반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들의 언론에 대한 입장,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국내 대중문화 저널리즘은 연예인들을 지나치게 흥미위주로만 다루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부풀려서 보도하거나, 극단적으로는 기사를 통해 사실을 만들어 나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건 분명히 대중문화 저널리즘이 반성해야 할 자세이며 비판받아야 할 요소다. <쉬리>와 <해피엔드>로 인기를 회복하는데 성공한 최민식씨의 경우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는 연예인이 아니고 엄연히 문화인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연예인과 문화인에 대한 그의 이중적 가치판단이 놀랍기는 했지만 우리사회가 흔히들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못된 가치를 부여해 왔는가를 고려하면 최씨의 그같은 구분된 인식은 충분히 수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배우들이 언론을 무조건적으로 기피하거나 백안시하는 태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더욱 당당히, 그리고 보다 정리된 논법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혀나가는 것이 순서상 맞는 일이다. 지난 해 10월말 동경영화제를 다녀왔던 한석규씨는 강제규감독과 함께 현지에서 80여건의 인터뷰를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극도로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석규씨가 국내에서 그렇게 전투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너무도" 매체를 가리는데,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정상의 인기라는 것도 사실은 대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언론매체를 가리거나 기파하는 것은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을 자신의 입맛대로 나누거나 거절하는 태도와 다름이 아니다. 이건 또 다른 엘리트주의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는 엘리트주의다.

심은하씨는 최근 변혁감독의 영화 <인터뷰>에서 여주인공을 맡고 있다. 영화속에서 그는 스스럼없이 카메라앞에 서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얘기를 전달한다. 영화속에서처럼 현실속에서도 심씨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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