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빼돌리던 산업 스파이…이젠, 돈만 되면 뭐든지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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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방장비 생산업체인 K사에 다니던 박모(35)씨는 2009년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경쟁업체인 D사에서 ‘K사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고체에어로졸 소화기의 설계도면 등을 빼내 우리 회사에 오면 수익금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후 박씨는 D사 대표, 소화기판권대행업체 등과 함께 제작 및 판매 계획까지 세웠다. 그는 K사를 그만두면서 설계도면·공정도·배합비 등 핵심 영업기밀을 USB(휴대용 메모리 장치)에 저장해 갖고 나왔다. 부산경찰청 산업기술유출수사팀은 지난달 18일 박씨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D사 대표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 등은 유출한 도면으로 제품을 제작해 시연해 보다 폭발사고를 일으켜 공모자 1명이 숨지기도 했다. 고체에어로졸 소화기는 기존 소화기보다 5배 이상 소화 성능이 뛰어나 경쟁사가 생산에 성공했을 경우 K사는 향후 3년간 약 600억원의 손실을 볼 뻔했다.

 #2. 경기도에 있는 난방기 생산업체의 전 영업본부장 김모씨는 2007년 부하 직원 4명과 함께 퇴사하면서 회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천장형 원적외선 복사난방패널’ 기술을 들고 나왔다. 이 기술은 기존 대류난방기보다 열 유실 정도를 30% 이상 절감해 연매출 100억원을 기록해 왔다. 지식경제부 산업기술로 고시된 이 기술개발에는 정부도 30억원을 지원했다. 김씨는 이 기술을 스페인의 현지법인을 통해 외국으로 빼돌리려다 경찰에 적발됐다. 경기경찰청 산업기술유출수사팀은 지난 1월 첩보를 입수하고 김씨 등을 미행해 지난달 검거했다.

 기업 간, 국가 간 산업정보전이 치열해지면서 첨단기술을 유출하려다 적발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10일 경찰청 외사국에 따르면 올해 1~3월 총 17건의 기술유출 사건을 적발해 82명을 검거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적발한 기술유출 사건(6건)에 비해 3배 가까운 수치다. 17건 가운데 외국으로 유출 시도를 하다 적발된 사건은 7건으로 상습 유출지역인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이외에 미국·독일 등도 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기술 유형별로는 수소발생기 제조기술, 위성방송 자동수신 안테나 설계도면, 복층 유리 제조장비 도면, 레이저 드릴링 반도체 제작 장비 관련 프로그램 등이었다. 대부분 첨단기술이었지만 전시장 설계도면, 골판지 절단기 설계도면 등도 있었다. 수사팀 관계자는 “피의자들이 돈만 되면 뭐든지 팔아 넘기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국내와 해외를 합해 기술유출이 적발된 곳은 서울(5건)·경기(6건) 지역에 몰려 있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 7월부터 서울·부산·대구·인천·경기 등 주요 지방청에 ‘산업기술유출수사팀’을 운영하고, 경찰청 외사수사과에 ‘산업기술유출수사지원팀’을 신설하는 등 기술유출 수사에 집중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고체에어로졸 소화기의 사례에서 보듯 기술유출은 경제적 피해뿐 아니라 원천기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인명을 살상하는 안전사고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11일부터 통합민원전화 1566-0112를 ‘산업기술피해 신고·상담’ 전화로 운영한다. 또 지식경제부·중소기업청과 협조해 국가 연구개발(R&D) 자금 지원 기업 등 핵심 기술 보유업체를 ‘중점 보호업체’로 지정해 기술유출 대응교육을 실시하는 등 지원을 강화할 방침이다.

박성우 기자

◆산업스파이=어떤 업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첨단기술 등을 국내 경쟁업체 또는 외국기업에 팔아 넘겨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의 통칭.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은 기술유출 등 영업기밀 누설의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이득액의 2~10배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외국기업에 기술을 유출한 경우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등 더 무겁게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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