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가 흥분하지 않고 ‘살며시’ 신고가 썼다는 의미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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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호 24면

주식 경험이 많은 투자자들은 ‘신고가’와 ‘신저가’라는 단어를 음미할 줄 안다. 역사적 신기원이라는 변화는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요즘이 그렇다. 코스피지수가 역사적 고점을 ‘살며시’ 돌파하고 있다.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끌지 않으면서 시장은 차분하게 새로운 영역이 들어서고 있다. 잔치판이 벌어지고 요란·법석해야 할듯 한데 투자자들뿐 아니라 업계 종사자들도 과거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 흥분하지 않는 신고가라…. 흥미로운 변화다. 왜 그럴까.

시장 고수에게 듣는다

시장이 성숙했기 때문일까. 부분적으로 맞다.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 동일본 대지진, 연평도 포격 등 다양한 악재를 겪었다. 하락만큼이나 상승에 대해서도 둔감해져 있을 수 있다. 과거 역사적 고점 때마다 아픔을 겪었던 트라우마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지수는 신고가지만 많은 투자자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대형 우량주가 상승해 코스피지수가 올랐다. 그런데 코스닥으로 대별되는 중소형주는 2000년(2925포인트)은 차치하고 2007년 고점(840포인트) 때보다 한참 낮은 530선에 머물러 있다.

일부에서는 외국인들만의 랠리여서 그렇다고 한다. 외국인들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신흥시장 자산을 사들이고 있다. 한국에서만 지난달 중순 이후 4조7000억원 이상을 샀다.

신고가 도달의 가장 큰 의미는 지금까지 어떤 고점에서 주식을 산 투자자도 손실을 보지 않는 영역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또 그동안 주식을 팔고 다른 자산군으로 대상을 바꾼 투자자는 기회손실을 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동산은 큰 변화를 겪는 중인 것 같다. 전셋값의 급격한 상승세 이후 부동산값을 밀어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파트 시가총액은 2003년과 2009년 각각 한때 증시 시총 대비 2.7배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말 기준으로 증시 시총의 1.4배 수준까지 떨어졌다. 부동산 가격 자체도 2006년 이후 고점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저위험 고수익’의 50년 불패신화가 ‘저위험 저수익’을 받아들이는 구도로 고착화하고 있다. 최근처럼 전 세계적인 ‘돈 찍어내기(Money Printing)’로 유동성이 공급되는 상황에서도 부동산은 체력이 바닥난 ‘노년성 자산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금과 채권 등 ‘금리부 자산’은 더 심각하다. 전체 가계부채가 1000조원에 육박하면서 가계 자산보다 부채의 증가 속도가 훨씬 가파르다. 금리부 자산을 통한 ‘돈 불리기’가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축성 예금은 264조원 늘었다. 역사적으로 세 차례밖에 없었던 실질금리 마이너스 상태(2004년 중순, 2009년 초, 2010년 9월 이후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 8개월째다. 예금에 몰린 돈은 물가상승을 이겨내지 못한다.

두 가지는 분명하다. 주식처럼 선행성이 강한 금융지표가 신고가를 경신했다는 것은 금융자산 내 역학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신고가에도 시장이 흥분하지 않았다면 이 주가는 아직 버블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2007년 말의 ‘2000포인트 시대’에는 버블이 있었다. 주가 상승 가속도의 관성과 과도한 펀드 열풍에 의해서다. 개인들이 열광하며 증시로 몰려들었지만 기업들의 실적이 받쳐주지 못한 2000시대였다. 주가수익비율(PER·높을수록 주가가 현재 실적에 비해 고평가됐다는 의미)이 14배에 육박했다.

그러나 이번 2000시대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정보기술(IT) 대표주 외에도 자동차·조선·기계·대체에너지·화학 등 금융위기 전에는 미덥지 않았던 여러 산업 분야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묵직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지금 신고가를 기록 중인 2100대 한국 증시의 PER이 10배에 불과하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세계 최고의 업종 대표주의 PER이 시장 평균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우도 많다. 전 세계에서 아마 국내 대형 우량주를 우습게 여기는 유일한 곳이 한국인 듯싶다.

자산 시장의 변화가 묵직하게 감지되고 있다. 시장 PER이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시작점이 왔다. 대형 우량주의 성장성에 살며시 동참하고, 이후 시장이 흥분할 때 파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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