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소비자는 웃고, 정부는 표정관리 … 그러나 시장은 냉정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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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겉모습)’라는 개념으로 일본인의 이중성을 해부했다. 베네딕트가 본 일본인은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를 들고 있지만(다테마에),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사람(혼네)이었다. 기름값을 둘러싼 정부와 정유사의 샅바싸움도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마찬가지다. SK에너지는 “국민경제 부담을 감안해” 기름값을 내렸다고 발표했고, 이에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국민 부담을 나눠 지겠다는 결정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기름값 인하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SK에너지 울산공장의 모습. SK에너지가 휘발유·경유값을 L당 100원씩 할인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다른 정유업체들도 기름값을 내릴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블룸버그]<사진크게보기>


#차익 실현 나선 증시

윤증현 장관

 “기름값 100원 내린다고 정유사 문 닫나?”

 신한금융투자 심재엽 투자전략팀장은 4일 이런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이날 증시에서 L당 100원의 할인 방침을 밝힌 SK에너지의 모회사 SK이노베이션 주가가 10% 넘게 급락하고 다른 정유사 주가도 크게 떨어지자 투자자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심 팀장은 “휘발유와 경유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고 정제마진이 유가 상승과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개선되고 있어 100원 인하가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며 일시적일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증권업계에서는 그간 정유·화학주가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반사이익 기대감으로 상승 폭이 컸다는 점에서 이번 기름값 인하가 차익실현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KB투자증권 이인재 연구원은 “대부분의 비용이 2분기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 2분기 정유사 실적이 큰 폭으로 하락할 전망”이라며 “다만 이번 가격조정으로 정부의 가격인하 압력이 잦아들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통 크게’ 내줬으니 앞으로 정부 눈치를 덜 봐도 될 것이란 얘기다. 

 #부담 던 정부

최중경 장관

 지식경제부 공무원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하루 전 SK에너지가 석유 값 인하를 전격 발표하자 한시름 덜었다는 분위기다. 지경부는 이번 주 석유가격 TF의 조사결과와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TF는 석 달을 끌며 온갖 방안을 짜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기껏해야 분석기간을 달리 설정하면 국제유가와 국내 기름값 변동이 차이를 보이는 ‘비대칭성’이 확인된다는 정도가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눈에 띄는 대책도 석유제품 거래시장 개설과 자가폴 주유소 확대 정도다. 자칫 ‘기름값을 내리려면 세금을 손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더 힘을 받을 판이었다. 이런 와중에 업계 맏형인 SK에너지가 ‘알아서’ 성의를 보였으니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나머지 정유사들도 부담을 느끼고 있다.

 주유소에서 파는 기름값은 지난해 10월 이후 반 년 동안 한 번도 내리지 않고 오르기만 했다. 기름값이 오르면 수많은 자가용 운전자들이 곧바로 체감한다. 게다가 전기와 보일러 등 공장의 원가인상 요인으로 작용해 물가지수를 빠르게 끌어올린다. 농축산물에서 시작된 물가 상승에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정부로선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물가당국도 환영했다. 기획재정부는 SK에너지의 유가 인하가 업계 전체로 확산될 경우 소비자물가를 분기당 0.05~0.06%포인트 내리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정유사들은 이제까지 휘발유·경유의 내수 판매로 남는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를 감안하면 이번 SK에너지의 ‘통 큰 결정’은 원가 이하로 기름을 판매하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원가 이하의 판매가 공정거래법의 부당염매에 해당되지는 않을까. 공정거래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경쟁사업자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닌 만큼 부당염매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정부와 기업, 꼭 이래야 하나

 올 초 이명박 대통령의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정부는 유가 인하 분위기 조성에 총력을 쏟았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등이 번갈아 나서 정유사를 압박했다. 기름값 테스크포스를 만들어 원가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여기서도 마땅한 해답이 보이지 않자 ‘자진납세’를 강요했다.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노골적 압력도 나왔다. 논리는 ‘영업이익이 많이 난다’는 것이었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의 1분기 영업이익이 사상 최대인 7500억~85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의 압력에도 “국내에서 기름 팔아 내는 이익은 L당 20원에 불과하다”며 버티던 정유사들도 논리가 궁색해졌다.

 조성봉 한국경제연구원 법경제연구실장은 “SK에너지의 유가 인하로 이어진 정부와 정유사의 공방을 보면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추구하던 현 정부 초기의 정책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며 “재량에 의한 자의적 개입주의 정책은 결국 장기적으로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서경호·최현철·손해용 기자

기름값에 대한 정부 인사들의 발언

▶“기름값이 묘하다.”

- 이명박 대통령, 1월 13일, 국민경제대책회의

▶“(국제유가가) 내려가면 (국내유가는) 천천히 내려가고 올라갈 때는 급속히 올라간다는 인상이다. 단정적으로 그렇게 보지는 않지만 국민 여론은 그렇다.”

- 이명박 대통령, 2월 1일, 국민과의 대화

▶“우리나라 세전 휘발유 가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2월 9일 경제정책조정회의

▶“내가 회계사 출신이다. 직접 기름값 원가를 계산해 보겠다.”

-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2월 10일, 취임 기자간담회

▶“정유사들의 주유소 공급가격이 투명하지 않다. 정유업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3월 15일, 서울의 주유소 현장 방문

▶“영업이익을 내는 정유사는 적자 내는 한전·설탕업계를 참고해야 한다. 성의표시라도 해야 하지 않나.”

-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3월 23일, 중앙일보 에너지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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