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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어버린 KAIST 용광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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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종윤
내셔널 데스크

2002년 9월 13일과 14일 밤.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캠퍼스는 뜨거웠다. 축제 열기는 깊은 가을밤을 불태울 기세였다. KAIST 캠퍼스에 초청된 손님도 젊음의 향연에 푹 젖어 있었다. 포항공대 학생들이었다. 두 대학 학생들은 축제기간에 ‘사이언스 워(Science War)’를 벌였다. 국내 최고의 해커를 가리기 위해 해킹 실력을 겨뤘다. 스타크래프트 게임 대회가 열린 대강당은 열기와 함성으로 폭발할 듯했다.

 한때 KAIST 동아리 ‘쿠스’와 포항공대 동아리 ‘플러스’는 해킹 라이벌이었다. 경쟁의식이 지나쳤다. 그래서 더 치열했다. 급기야 1996년 카이스트 학생이 포항공대 전산시스템에 침투해 자료를 아예 지운 사실이 발각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해킹 전쟁이었다. 이 사건으로 KAIST 학생들이 구속됐다. 비록 법을 어겼지만 캠퍼스에는 도전과 모험정신이 넘쳤다. 학교 측은 이런 젊음의 일탈을 축제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2002년 가을의 KAIST는 청춘의 용광로였다.

 8년 6개월이 지났다. 다시 찾은 KAIST캠퍼스, 용광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올 들어 세 명의 꽃다운 청춘이 잇따라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동료들은 충격에 입을 다물었다. 학교 측도 당혹스러워 한다. 무엇이 잘못됐나. 답답함을 토로한다.

 문제의 원인을 단칼에 ‘이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폴트 라인(Fault Line)’은 있었다. 지질학 용어로 지진 유발 단층선을 말한다. 지각판의 맨 아래 맨틀이 움직이면서 판들끼리 충돌해 부서지거나 깎이면서 엄청난 압력이 발생한다. 이게 지진이다. 지진이 발생하는 접촉 면이 폴트 라인이다.

 KAIST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고 간 폴트 라인의 하나는 ‘학업 성적’이다. 일부러 나쁜 성적을 받으려는 학생은 없다. 노력은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 한 번의 실패는 다음 도전을 위한 밑거름이다. 그렇지만 KAIST 학생들에게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이다. 원래 학생들은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과학 영재 양성을 위해 납세자는 기꺼이 세금을 냈다. 하지만 2006년부터 성적이 기준점(3.0) 미만이면 등록금을 내야 한다. 9학기 이상 다녀도 마찬가지다. 이건 학생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세금을 무한정 지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학점 3.0을 넘을 수는 없다. 성적이 나쁘다고 이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학생들이 모두 좋은 성적을 내 장차 노벨상을 노리는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다.

 뻥 뚫린 과학 영재들의 가슴을 제대로 메우지 않는다면 폴트 라인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꽃잎들은 계속 시들게 된다. 성적이 떨어져도 개성을 인정하고, 창의성을 북돋는 학교, 이런 학풍을 KAIST에서 보고 싶다. 식은 용광로에서는 강철을 만들 수 없다.

김종윤 내셔널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