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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중국경제 콘서트(49) ‘관씨의 저주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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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총영사관에 K영사가 부임합니다. 2008년 8월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일이 생깁니다. 서울에서 화물로 부친 K영사의 짐이 상하이 해관(관세청)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는 2000년대 초 베이징의 한국 대사관에서 상무관 생활을 지낸 '중국통'이기도 했습니다.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던 지식경제부의 엘리트였지요. 그런 그의 짐이 통관을 못하고 상하이 항에 묶여있던 겁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짐은 무려 3개월 넘게 묶여 있었습니다. 더욱 총영사관을 놀라게 했던 것은 상하이 해관의 태도였습니다. 'K영사가 밀수를 했다'며 총영사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도 했답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관세관(관세청 파견 영사)'가 나서기 마련입니다. 관세관은 그동안 구축했던 해관 내 ''관시(關系)'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왠지 관세관의 인맥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된 통 걸린 것이지요.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요.

콘테이너에 짐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살림 도구라는 게 뻔합니다. TV 1~2개, 냉장고 1개, 컴퓨터 1~2대 정도입니다. 그런데 K영사의 짐에는 TV가 무려 10여 개, 냉장고가 5개, 컴퓨터 10대가 될 정도로 짐이 많았습니다. 이걸 어찌 한 집의 살림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상하이 해관은 그것을 문제 삼은 것이지요. 외교관 특권을 이용해 밀수를 했다는 게 상하이 해관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당연한 문제 제기입니다.

영사가 밀수를 했을 리 있겠습니까. 문제는 K영사가 콘네이너 속 짐을 모두 자기 것으로 신고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왜 그랬는 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K영사가 이주비를 아끼기 위해 남의 물건과 함께 자신의 짐을 실토록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됩니다. K영사는 화물회사가 한 일이며,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왜 자신의 물건이라고 신고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어쨌든 '엘리트' 공무원이 할 일은 아니었던 겁니다.

총영사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K영사는 4개월 째 짐이 나오지 않으니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총영사관 영사들이 'K영사 짐 구출작전'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상하이 해관은 법대로 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 여인, 덩신밍(鄧新明)이었습니다.

"당시 덩신밍은 교포 사회에서 '실력 있는 여인'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교민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기도 했지요. K영사 짐을 찾을 수 만 있다면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총영사에게 덩 여인을 보고했지요. 덩씨를 활용해보자고 말입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총영사관 근무를 했던 한 인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덩 여인이 나서자 해관에 묶였던 짐이 불과 며 칠 만에 풀려 나온 겁니다. 와우, 총영사도 놀랐습니다. 4개월 숙원이 전화 '한 방'으로 해결 됐으니 말입니다. 덩 여인은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영사관으로서는 범접하지도 못할 대단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그후 총영사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잘 알압니다. 여럿 영사들이 덩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심지어 덩을 사이에 두고 영사끼리 주먹다짐을 했고, 덩에게 부정 비자를 발급하기도 했습니다. 총영사는 낮뜨거울 정도의 포즈로 덩과 나란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각 신문에 보도된 그대롭니다. 여기서 그 추접한 내막을 더 끄집어내지 않겠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덩신밍을 '스파이'로 키운 것은 결국 총영사관의 외교관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뿐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이 물음에 한마디로 답합니다.

'관시(關係)의 저주'라고 말입니다.

흔히 '중국은 관시의 나라'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수 개월이 걸려도 되지 않던일이 관시를 통하면 전화 한 통으로 쓱싹 해결되니 말입니다. 중국 비즈니스맨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관시 만들기'입니다. 관시를 위해 유력자의 자식에게 미국 유학을 시켜줬고, 퇴직 후 고문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권을 챙겼고, 방패막을 쳤습니다.

우리 외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순환 근무에 따라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오게 된 외교관 님들은 중국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이 중국 측 파트너와 신뢰를 쌓고, 중국 측 정부 고위직 인사와 선을 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관시를 찾아 다닙니다. '중국 외교는 곧 관시망 만들기'라는 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중국을 봐왔고, 그런 식으로 비즈니스와 외교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중국인과 몸으로 부딪치며 만든 관시가 아닌, 돈으로 산 관시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내 땀과 노력으로 만든 관시가 진짜 관씹니다. 그러기에 중국어도 해야하고, 중국 지식도 갖춰야 하는 겁니다. 돈으로 산 관시는 그냥 술 친구에 불과하니까요.

관시는 의존의 대상도 아닙니다. 관시에 의존해 만들어진 사업은 틀림없이 망합니다. 내 기업의 기술과 경쟁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 중국 사업가들은 "관시는 사업의 윤활유일 뿐 결코 의존의 대상은 아니다"라며 "일을 추진하다가 막힌 곳을 뚫을 때 필요한 게 관시라고 말합니다. 결국 믿을 것은 내 실력이고, 내 기업의 경쟁력입니다. 합법경영이 최고입니다. 관시에 의존한 비즈니스는 허상일 뿐이라는 얘기지요.

다시 '상하이 스캔들'얘기로 돌아와볼까요. 덩 여인은 2001년 한국인 남편 J씨와 결혼해서 10년 동안 한국인을 지켜봐왔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헛점이 너무 많았지요. 사업가나 외교관이나 관시에 목을 메고 있다는 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작은 미끼에도 월척을 척척 건져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한국 외교관의 실력도 금방 파악했을 겁니다. 그가 보기에 한국 영사관들은 '초짜(初者)'였습니다. 영사라는 사람들은 부임해 오면 중국어 배운다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한 6개월 쯤 되면 대충 됐다고 생각하고, 배우기에 게을리하지요. 어지간한 일은 밑에 조선족 직원시키면 되니까요. 그렇게 다시 1년 정도 근무해 이제 일 좀 할만하다 싶으면 다음 부임지를 걱정합니다. 3년 정도 근무하면 순환근무 원칙에 따라 훌쩍 어리론가 가버리지요. 전문성이라는 게 쌓일 리 없습니다.

물론 중국 붙박이가 없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원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10년 근무했다는 게 외교부에서는 절대 자랑이 아닙니다. 그냥 중국에서 '썩었다'는 정도로 인식될 뿐이지요. 그게 중국에 대한 시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중국전문가로 크고 싶어하겠습니까. 중국을 모르고, 또 알고자하지도 않습니다. 교민들에게 폼만 잡다가 3년 임기 마치고 돌아가는 외교관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래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실적도 쌓아야 했지요. 누군가 나의 무능력을 포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덩신밍'이었던 겁니다. 관시의 달콤함은 한 번 맛들이면 헤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쌓기보다는 브로커에 의존하려 합니다.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게 되면 그들에게 흠도 잡히고, 휘둘리게 되어 있습니다. 의존도가 높을수록 덩의 요구는 더 높아졌고, 그 요구를 들어줄지 말지를 놓고 영사끼리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를 덩씨가 파고들어 휘젓고 다녔던 겁니다. ‘관시 외교’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적나라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하이의 한 기업인 얘기입니다.

/내 실력이 없고, 기업의 경쟁력이 없는 상황에서 '관시'에 의존해 일을한다면 결국은 그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에 혹 문제가 생기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요구하는데로 다 들어줘야 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다 해야 한다. 질질 끌려다녀야 한다. 이번 상하이 스캔들 역시 그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총영사가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K 총영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MB맨'이랍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밀려났던 그는 MB의 '보은'을 받아 상하이로 오게 됐습니다. 중국, 모릅니다. 중국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공공 장소에서 상하이 지도자를 비난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했을 겁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총영사관 근무가 정치적 성장의 발판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뭔가 확실한 끈이 필요했습니다. 상하이 시정부 사람들과 줄을 댈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그게 덩씨를 잡은 이윱니다. 그의 비호하에 덩은 총영사관을 휘저으며 호령할 수 있었습니다. K총영사의 말대로 덩은 '한중관계의 귀중한 자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도록 방치한 책임은 어떤 말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을 총영사로 임명했다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미국통이기에 중국 근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했어야지요. 총영사관으로 부임하는 순간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송민순 의원이 국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소총 좀 쏘면 군단장 시키고, 수영 좀 하면 함대사령관 시킨다."

어쩌면 임명권자는 상하이 총영사 자리는 자기 측근에게 '옛다, 너나 먹어라'라고 던저주는 떡 정도로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총영사관 영사들 사이에 정보교류가 없었다는 겁니다. 덩씨를 놓고 '이렇게 유능한 사람을 총영사관 차원에서 활용하자'고 했다면 달랐을 겁니다. 미심적인 일에 대해 서로 견재도 하고, 보완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총영사관 영사들은 정보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덩'이라는 밧줄은 자기 몸값을 높이는 수단이라고 생각한 탓이겠지요. 덩은 그 사이를 파고 들었습니다. 덩은 K영사와 친한 듯 하더니 어느 덧 비자를 담당하던 H 영사와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두 영사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겁니다. 덩씨가 K 영사를 협박해 '손가락 각서'를 쓰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입니다. 이게 배웠다는 영사들이 할 짓입니까?

'관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몸으로 뛰고, 몸으로 부딪쳐가며 만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관시가 아닙니다. 관시는 개인의 인맥이 아닌 기업이 공동으로 관리해야할 자산이어야 합니다. 내 실력이 없다면, 내 기업의 경쟁력이 없다면 관시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상하이 스캔들을 '관시의 저주'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번 사건은 그냥 돌출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들이 축적되고 쌓여 폭발한 것일 뿐입니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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