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재래시장에서 패션특구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상인들이 국내 시장을 점령했을 때 민족상권의 명맥을 이었던 서울 동대문 시장. 재래식 시장의 대명사였던 이곳은 20~30층의 초대형 매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젊음의 패션 특구'로 바뀌고 있다.

◇ 상인들의 애환을 담은 생존경쟁의 현장〓동대문 시장은 1905년 5월에 포목상을 하던 종로상인들이 주축이 돼 광장시장을 만들면서 출발했다.

짚신 대신에 고무신이 등장했고 양동이.빨래비누.치약 등 신식 생활용품이 거래돼 장안 아낙네들의 발길을 끌었다.

'6.25 사변'으로 시장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다.
상인들은 폐허위에 천막을 치고 헌 옷가지와 가재도구 등을 맞바꾸는 물물교환으로 장사를 재개했다. 시장에 활력을 준 것은 구호물자나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외래품.밀수품 거래였다.

상인들은 시장 신축을 위해 재건위원회를 만들었고 57년 이승만(李承晩)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공식을 갖고 2년 뒤 지금의 3층 건물을 세웠다.

깡패도 위세를 떨쳤다.
경기도 이천 출신의 '주먹' 이정재(李丁載)가 지난 56년 조직한 화랑동지회라는 폭력단체가 그 예. 李씨는 입주상인도 아니면서 동대문 시장 상인연합회장 자리를 차지하고 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걷었다.

광장시장 인근 청계천 5.6가 대로변에 이북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53년경 지금의 평화시장이 형성됐다. '평화'란 이름에는 전쟁 때문에 북한에 재산과 가족을 남겨두고온 실향민의 염원이 스며있다. 이곳에선 미싱 한두 대씩을 놓고 몸빼 등 의류를 직접 만들어 팔거나 변칙적으로 흘러나온 미군복을 염색해 판매했다.

이곳에서 30년째 양장지 가게를 운영하는 김숙자(金淑子.56.여)씨는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전국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골목마다 가게와 노점상들이 뒤엉켜 난장판을 이뤘다. 특히 이북 출신들은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고 회상했다.

월남민들은 기존 상인의 거래처에서 물건을 받기 위해 웃돈을 줘야했다. 반면에 물건은 오히려 더 나쁜 것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金씨는 "월남민들은 판자촌에서 하루 3~4시간만 자면서 악착같이 일했다. 고객에게는 덤으로 생활용품을 주는 등 단골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 말했다.

동대문 시장의 전성시대는 60년대. 국내 직물.섬유.청과류의 시세를 좌우했다. 1만여 점포에 하루 20만명의 고객이 몰렸다. 야시장과 순대골목의 노점상들도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런 와중에 70년 11월 평화시장의 의류 노동자 전태일은 열악한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노동법 책자를 손에 들고 분신자살을 해 노동운동의 일대 전기를 열기도 했다.

60년대 말 동대문 시장은 '창신동 부자' 정시봉(鄭始鳳)씨가 전국 최대 시장을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7층 건물의 동대문 종합시장을 세우면서 새 모습으로 탄생했다.

양장지 등을 취급하는 광장시장과 여성의류 등을 파는 평화시장은 60년대 말부터 예전의 명성을 잃기 시작했다. 70년대 혼수용품 전문상가였던 동대문종합시장은 80년대 말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대형 백화점의 등장과 시장 전문화 추세에 밀려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광장시장 김학석(金鶴錫)총무부장은 "첨단 시대에도 재래시장의 역할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젊음의 패션 특구〓90년 초 흥인시장 뒷편에 여성의류를 판매하는 아트프라자가 들어서면서 첨단 패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후 동대문 시장 건너편에 프레야 타운(96년 9월 개장.지상 22층 지하6층).밀리오레(98년 8월.지상 20층 지하6층).두산타워(지난 2월.지상 33층 지하7층)등 초대형 의류매장이 속속 문을 열었다.

이 일대는 밤낮없이 찾아드는 10~20대 고객들로 대성황을 이룬다. 23일 오후 10시 두산타워 1층. 선물을 사러 온 창문여고 朴모(17)양은 "외국 패션잡지 VOGUE에 실린 상품이 며칠 뒤면 나와 있을 정도" 라고 귀띔했다.

창동중 2년 崔모(14)군은 "TV에서 연예인들이 입는 옷을 여기에 오면 싸게 살 수 있다. 테크노댄스 축제 등 10대들이 직접 참가할 수 있는 공연도 많아 1주일에 3차례 정도 들른다" 고 말했다.

외국 상인도 하루 2천명씩 이곳을 찾는다. 일본인 사에코(40.여)씨는 "값이 싼데다 일본에서 유행한다 싶으면 이미 동대문에 나와 있다" 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양희(金良姬)수석연구원은 "시설은 좋아졌지만 손님접대.교환.환불 등 서비스는 아직 미흡한 수준" 이라고 지적하고 "주차.숙박시설 등 인프라의 개선이 시급하다" 고 강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