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지식·과학] 과학으로 본 교통체증 원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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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당 1967.87원. 29일 오후 7시30분 현재 전국 주유소에서 판매되고 있는 보통휘발유 평균 가격이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사이트 오피넷 www.opinet.co.kr 기준). 기름값이 이렇게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고유가 시대에 교통 체증은 운전자들의 ‘공공의 적’이다. 꽉 막힌 도로에 가만히 앉아서 꼬박꼬박 돈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곳곳에 교통혼잡구간(출퇴근 시간대 차량 속도가 시속 10㎞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주 3회 이상 되는 곳)투성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530㎞나 된다. 이로 인한 교통혼잡비용은 2009년 이미 연 26조원을 훌쩍 넘겼다.

교통 체증은 왜 생기는 걸까. 통상 세 가지가 주 이유로 꼽힌다. 교통사고, 도로 공사, 그리고 병목현상.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 차가 막히는 경우도 있다. 소위 ‘유령 체증(phantom jam)’이다. 이런 체증은 도대체 왜 생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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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들은 이미 1950년대부터 수학적 모델링 기법을 통해 그 원인을 연구해 왔다. 실제 교통 흐름을 유사하게 재현하는 수학적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든 뒤 특정 변수가 정체를 유발함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이 같은 교통흐름 모델은 접근 방식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개별 차량의 움직임을 구별하는 대신 교통 흐름 전체를 유체역학(fluid mechanics) 방법으로 분석하는 거시적인 모델과 차 한 대 한 대의 움직임을 간단한 규칙으로 기술하고 이를 통해 전체 교통 흐름의 성질을 연구하는 미시적 모델이다. 이 같은 노력 덕에 최근 유령 정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영국 엑서터·브리스톨대, 헝가리 부다페스트대 공동 연구팀은 2007년 영국 최고 권위의 왕립학술원(Royal Society) 학회보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운전자들의 ‘반응 시간 지체(reaction-time delay)’를 ‘유령 체증’의 원인으로 꼽았다.

 가령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맨 앞에 달리던 대형 트럭이 갑자기 차선을 바꾸면 뒤차들은 줄줄이 속도를 줄이게 된다. 하지만 운전자가 앞차의 움직임을 보고 반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때문에 앞차가 감속을 하면 뒤차 운전자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뒤늦게 앞차보다 더 큰 폭으로 속도를 줄이게 된다. 그 뒤차, 그 뒤의 뒤차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이 수㎞에 걸쳐 누적되면, 결국 무리의 맨 뒤쪽 차는 아예 멈춰 서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가보 오로즈 박사는 “브레이크를 밟더라도 얼마나 세게 밟느냐가 중요하다. 뒤늦게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정체가 심해진다”고 말했다.

 실제 자동차 실험을 통해 ‘유령 체증’을 재현한 사례도 있다. 2008년 일본 중부 기후(岐阜)현 나카니혼(中日本)자동차단기대학에서다. 나고야(名古屋)대 복잡계 과학 연구진은 이 대학 캠퍼스 내에 있는 길이 250m의 원형 도로에서 22대의 차로 주행 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차를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한 후, 운전자들에게 일정한 속도(시속 30㎞)로 달리도록 했다. 하지만 도로 중앙부에 360도 카메라를 설치하고 차량 흐름을 촬영한 결과 처음에는 일정하게 달리던 차량 중 일부가 불과 수분 뒤 정체군을 형성하는 모습이 확인됐다. 사람이 운전하다 보니 차마다 속도에 미세한 차이가 났고, 이 같은 차이가 누적되면서 결국 차간 간격이 좁아진 것이다. 연구를 주도한 스기야마 유키(杉山雄規) 교수는 “실험에 나타난 정체 규모가 작긴 했지만, 그 양태는 실제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수용 규모 이상의 차가 몰리면 한순간 정체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결국 ‘유령 체증’의 원인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교통량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령 체증’을 벗어날 묘수는 없을까. 유감스럽게도 당장은 없다. 2009년 유체역학 방정식을 이용해 교통 정체 현상을 규명한 미국 MIT대 수학자들은 모델 연구를 통해 도로 설계 때 정체 발생 가능성을 줄일 수는 있어도 “일단 정체가 발생하면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저절로 풀릴 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운전자들이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도 다행이다. 사람들은 통상 도로 ㎞당 차가 20대 이상이 되면, 자기 차선보다 옆 차선이 덜 막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1999년 캐나다 토론토대, 미국 스탠퍼드대 공동연구). 두 차선의 평균 속력이 같더라도 심리적인 이유로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이다. 도로가 주차장이 된 상황에서도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는 차들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차들 때문에 정체는 더욱 심해진다.

글=김한별 기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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