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우리가 청와대 하급기관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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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청와대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정치자금법 개정 의견에 대해 ‘정치 개악’ ‘과거로의 회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자, 선관위가 29일 청와대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선관위 핵심 관계자들이 주요 언론에 청와대 참모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 것이다. 마치 청와대에 ‘대든’ 형국이다.

 선관위 핵심 관계자는 29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선관위는 현실과 법률 사이의 괴리를 좁히려고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내고 논의 중”이라며 “그러나 헌법상 독립기관인 선관위를 향한 청와대의 반대 입장 표현방법은 너무 거칠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선관위가 청와대의 하급기관인 줄 아느냐”고 불쾌해했다.

 선관위는 법인과 단체는 선관위에 연간 1억5000만원 한도의 정치자금을 기탁할 수 있도록 하고, 기탁된 돈의 50%는 지정 정당에, 나머지는 국고보조금 배분비율에 따라 정당에 나눠주는 내용의 정치자금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자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28일 브리핑에서 “깨끗한 정치를 하자는 취지에서 현재의 법안이 있다”며 “몇 년 동안 국민과 다 함께 노력했던 마당에 다시 (정치자금법을) 과거로 돌리는 것은 깨끗한 정치를 하자는 국민적 염원에 맞지 않다”고 밝혔다. 또 정진석 정무수석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국민 눈높이를 무시하는 ‘정치 개악’은 어떤 명분으로도 성공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익명의 청와대 한 관계자는 “정치권의 ‘청부입법’이라는 인상이 짙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선관위 핵심 관계자는 “법인과 단체의 정치자금 기탁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중”이라며 “그래서 선관위를 통해 제한적으로만 지정기탁을 하고, 모든 기탁 내용은 인터넷에 공개하자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다른 선관위 관계자는 “정무수석이라는 분이 헌법기관의 의견을 ‘정치 개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며 “특히 ‘청부입법’ 운운하는 것이 도대체 합당한 표현이냐”고 흥분했다. 그는 “다음 달 4일 중앙선관위 회의 때 정치자금법 개정 의견 검토안을 상정해 최종 의견을 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관위는 2004년 3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을 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선거 중립 의무 준수’를 요구해 청와대와 충돌한 적이 있다. 2007년 6월에도 한나라당을 비판한 노 대통령에게 ‘선거 중립 의무 준수’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청와대와 갈등을 빚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는 “정치자금법을 고친다는 게 간단한 사안이 아닌데 청와대나 선관위의 대응이 사려 깊지 못하다”며 “양측의 충돌에서 레임덕(권력누수) 분위기도 엿보인다”고 말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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