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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내전을 보는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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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위험을 피하는 것이 지혜다. 그러나 위험을 피해서는 승부에서 이길 수 없다. 어느 선까지 밀고 갈 것인가.

 선을 넘으면 상대의 맹렬한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전쟁의 위험에 굴하지 않고 기어이 한 발 더 들어가 승리한다면 그건 ‘용기’이고, 패배한다면 곧장 ‘만용’의 낙인이 찍히게 된다. 용기와 만용은 한 발 차이다.

 반격이 두려워 한 걸음 물러선다면 전쟁 대신 평화가 이어진다. 그렇게 해서 승리하면 ‘신중’이란 칭찬을 받게 되고, 패배한다면 신중은 곧바로 ‘소심’으로 전락한다. 신중과 소심도 종이 한 장 차이다. 바둑은 승부처를 만날 때마다 이 같은 갈등과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카다피 대 시민군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리비아 내전을 지구 저편 밥상머리에 앉아 한 판의 바둑을 보듯 흥미진진(?)하게 관전한다. 리비아 국민, 카다피, 연합군이 보이지 않는 선(線)을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맞서고 있는 현장에 인간방패 등 온갖 수가 난무한다. 27살에 이미 목숨을 건 승부수를 던져 성공을 거둔 카다피는 70세가 됐는데도 승부 기질이 무섭다. TV화면을 통해서나마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 리비아 국민들의 분노와 봉기, 봉기는 전쟁으로 비화하고 카다피와 반군이 된 국민은 서로 옥쇄를 천명했다.

 옥쇄 전법이란 본시 약자의 전유물이며 지킬 것이 많은 상대에게만 유효한 전법ㅡ. 그러므로 ‘이 승부는 카다피가 무조건 진다’고 생각했는데 사태는 다르게 흘러갔다. 중국과 러시아가 또 다른 바둑을 두며 승부를 저울질하는 사이 반군은 진짜 옥쇄 직전으로 몰렸다. 이대로 카다피가 승리하나, 만에 하나 그리될 경우 민주주의와 강대국들은 무슨 낯으로 살아갈까 싶을 때 극적인 결의, 공습, 반전이 일어났고 오늘(28일) 신문을 보니 ‘리비아 시민군 동부 요충 4곳 재탈환 성공’이란 기사가 실렸다. 형세 역전이다.

 사실 전쟁보다 참혹한 재난은 찾기 어렵다. 리비아의 재난이 길어지고 있으나 전쟁 DNA 탓인지 영화에 중독된 탓인지 이상하게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것 같다. 리비아에서도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한데도 리비아의 재난과 일본의 재난은 왜 그토록 다르게 다가오는 것일까. 리비아인의 죽음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니까 슬프지 않은 것일까, 일본은 가깝고 리비아는 먼 탓일까. 자연이 만드는 재난은 불가항력이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재난은 막을 수 있다. 당연히 막을 수 있는 재난이 막을 수 없는 재난보다 더 슬퍼야 할 텐데 왜 반대로 나타나는 것일까.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지만 바둑과 인생이 크게 다른 것 하나는 사랑, 정의, 연민, 민주주의 같은 가치가 바둑판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악이 있다면 오직 이기는 수는 선(善)이고 지는 수는 악(惡)일 뿐이다. 그런 게임의 논리로 리비아 내전을 바라보지 말자면서도 어느덧 리비아 지도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혹 우리의 6·25도 먼 곳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한 판의 바둑이었을까.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