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현욱의 과학 산책

기억의 왜곡과 창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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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

기억은 왜곡의 명수다. 1970년대 초 영국의 전기작가 필립 자이글러(Philip Ziegler)와 서섹스대학의 인류학자 톰 해리슨(Tom Harrison)의 연구가 이를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서섹스대학 ‘대중 관찰(Mass-Observation)’연구소에 보관된 일기에 주목했다. 그중 1940~41년 런던이 독일 폭격기의 대공습을 받던 상황을 특히 생생하게 묘사한 것들을 골라냈다. 일기는 ‘대중 관찰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기증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일기의 주인공들에게 편지를 보내 30년 전 폭격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달라고 부탁했다. 6명에게서 답신을 받은 자이글러의 분석 결과는 이렇다. “기억은 두려운 속임수를 쓴다. … 그들의 회상은 시간, 장소, 사건의 순서 등 모든 것이 일기와 달랐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자신들을 사건의 중심에 더 가까이 끌어다 놓았다. 이웃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이제 자신들이 직접 겪은 사건이 되었다.” 그는 “전기작가에게는 모든 증거가 의심의 대상이지만 그중 신뢰도가 높은 것이 일기, 그 다음이 편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구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기억은 창조에도 일가견이 있다.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의 킴벌리 웨이드(Kimberley Wade) 교수 연구팀이 ‘심리작용학 회보(Psychonomic Bulletin & Review)’ 2002년 9월호에 발표한 논문을 보자. 이들은 조수 20명을 모집해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열기구를 타본 일이 없는 사람을 추천하게 했다. 20명의 대학생을 선정한 연구팀은 조수에게서 넘겨받은 4~8세 시절 기념사진을 4장씩 제시했다. 그중에는 당사자가 열기구를 타고 있는 것으로 합성한 가짜가 한 장 끼어 있었다. 그리고 3~7일 간격으로 세 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주문했다. 그 결과 상당수가 가짜 사진과 관련된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비율은 첫 인터뷰 땐 35%였다가 세 번째엔 50%로 올라갔다(실제 사진에서 추억을 떠올린 비율은 93%→97%였다). 이들은 기억의 공백을 ‘있었을 법한 추억’으로 채워가면서 사진이라는 ‘현실’과 타협했던 것이다.

 요즘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책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일기 8000장을 축약했다고 출판사 측은 주장한다. 하지만 전기 작가가 이를 신뢰할 것 같지는 않다. 사실과 다르거나 믿기 어려운 대목이 여러 군데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일기였을까. 아니면 자기합리화를 위한 왜곡이나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향한 창조의 산물이었을까.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 poemlove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