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서 비빔밥 먹으며 하루 17시간씩 죽어라 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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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과 행정·외무고시를 수석 또는 최연소로 합격한다. 잠깐의 법관 생활을 거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세계 최고 명문대라는 하버드와 예일 법대를 전 과목 A학점으로 졸업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졸업한 컬럼비아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런 뒤 뉴욕의 세계 최대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다 귀국한다면?

모든 학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할 ‘환상 스펙’이다. 그런데 그런 공신(工神·공부의 신)이 있다. 한나라당 고승덕(사진) 의원이다. 법조인 출신이 60명(한나라당 38명)에 달하는 18대 국회에서도 그의 스펙은 압권이다.

고 의원은 요즘 ‘고승덕의 ABCD 공부법’ 특강을 하느라 분주하다. 강연장엔 ‘공부 비법’을 배우려는 수험생과 학부모로 넘친다. 또 청소년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멘토링하기 위해 ‘드림 파머스’(꿈을 키우는 사람들)란 청소년 단체를 만들었다. 대학음주문화를 바꾸자는 캠페인도 전개한다. 공부를 통한 성공 경험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그에게 공부 비결을 물었다.

-공부 박사로 불린다. 비법은 뭔가.
“그저 노력뿐이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가 질량과 광속도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만들었다. 내가 이것을 모방해 인생함수를 만들었다. 성공은 결국 시간과 집중력 제곱에 비례한다. 각자의 지능엔 큰 차이가 없다. IQ 분포를 보면 97%가 80부터 120 사이에 있다. ±20%의 편차다. 하지만 하루 10시간 공부하는 수험생과 17시간 공부하는 사람은 70%의 시간 차이가 난다. 시간 때우기 식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초긴장 상태에서 죽어라고 공부하면 공부량은 제곱으로 늘어
나 3~5배의 차이가 날 수 있다.”

-하루 17시간씩 어떻게 공부하나.
“모든 수험생이 밥 먹고 잠 자는 시간 외엔 공부한다. 똑같다. 그래서 나는 밥 먹는 시간에도 공부하는 방법을 찾았다. 비빔밥이다. 보통 밥 먹고 소화시키는 데 한 시간 남짓 시간이 걸린다. 나는 책상에서 공부하며 비빔밥을 먹었다. 씹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모든 재료를 칼로 잘게 썰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고기는 가루고기만 먹었다. 그러니까 하루 17시간씩 공부하는 게 가능했다.”

-높은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는 게 힘들지 않았나.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죽지 않더라. 내가 하는 정도의 공부는 누구나 한다. 그러니 죽도록 공부하지 않고 그냥 공부하면 밑에서 치고 올라갈 수 없다. 경쟁자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해야 한다. 절벽에서 소나무를 잡고 매달려 있는데 그것을 놓으면 바로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심정으로 공부했다.”

-그렇게까지 공부에 집착한 이유는.
“개인적으론 아버지를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는데 군의관 생활을 오래했다. 아버지는 6남2녀의 장남인 데다, 나를 포함해 2남2녀를 뒀다. 광주의 도로 포장도 안 된 변두리에서 많은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 돈 버는 사람이 없어 기본 생활조차 힘들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개업했을 땐 돈이 없어 집 한쪽 방에 조그만 진료소를 열었다. 아버지는 평생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도 대한민국 의사 중 가장 가난한 의사였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노력만 하면 된다는 말은 누구나 한다. 어떻게 초심을 이어가느냐가 문제 아닌가.
“초등학교 다닐 땐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이 정말 듣기 싫었다. 그 말이 듣기 싫어 세 번이나 가출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생각을 바꿨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기고에 합격했는데 첫 학기 성적이 60명 중 끝에서 네 번째였다.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성적으론 갈 대학이 없다. 네 인생은 틀렸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이 컸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죽어라고 공부했다. 여름 방학 때 책상에 앉아만 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토피 수준으로 불그레하게 까졌다. 지금도 공중 목욕탕에 못 간다. 겨울엔 너무 추워 스웨터 두 개를 껴입고 이불 두르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공부했다. 그랬더니 수석 졸업에 서울대 법대 입학이라는 인생역전이 일어났다. 죽어라고 공부하면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때는 없었나.
“남들은 나에게 승승장구한다고 말하지만 위기가 많았다. 첫 번째 위기는 ‘대학 못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다. 또 이혼을 했는데 그때도 죽음보다 큰 고통이 있었다. 그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주식투자를 했는데 두 번이나 망했다. 펀드로 돈을 날린 뒤에도 변호사 해서 번 돈을 많이 축냈다. 법관으로 일할 때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고비가 있었다. 허무하다는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는 데 1년 이상 겪었다. 내 인생은 비주류 인생이다. 고시에 일찍 합격했지만 법관 생활은 2년밖에 안 했다. 아버지께선 ‘법조인이 왜 유학을 가느냐’고 반대했지만 미국에서 7년이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외화내빈, 깡통인생’이라고 한다.”

-어떻게 극복했나.
“죽고 싶도록 괴로운 순간이 있는데 지나고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힘들 때마다 1년 지나서 돌아보자. 죽고 싶어도 죽지 말고 1년 지나서도 정말 괴로운지 참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 지나고 돌아보면 ‘왜 그렇게 괴로워했지?’ 생각하게 됐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믿는 자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있다. 지나고 나면 좋은 일의 일부가 된다는 뜻인데 어려운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으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극복되지 않는 위기란 없다. 다만 무엇엔가 가치 있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몰입 대상이 주로 공부였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뭐냐를 찾는 게 내 스타일이다. 고시 3과에 응시한 이유도 사법시험에 너무 일찍 합격해 남은 대학생활을 활용할 생각에서였다. 미국 유학은 한국고등교육재단으로부터 전액 장학금 제안을 받아서였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당장 하고 나중에 할 건 미뤄 두자는 게 내 인생철학이다. 1995년 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나이 들면 코미디 프로에 못 나갈 것 같아 출연했다. KBS 재테크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당시 담당 PD가 한국경제TV를 시작하면서 MC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재야 주식고수들이 출연해 시청자의 주식 고충을 상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주식투자를 배우면서 어려운 상황을 좋은 상황으로 반전시키는 힘을 얻었다. 당시 결혼생활이 깨지며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나 홀로 외로움과 아픔을 씹는 상황이었다. 술 마시고 망가지는 쪽이 아니라 밤새워 주식을 연구하는 쪽으로 갔다.”

-아이들에겐 어떤 직업을 권하고 싶나.
“내 삶은 부모의 바람과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의대 입학을 권했지만 나는 법대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미국 유학, 방송 출연, 주식투자, 정치 입문에 모두 반대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뭘 시킨다고 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식이 가려는 길을 방해하지 않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본다. 사람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자식에게 희망과 꿈을 주고 북돋아 주는 게 부모의 할 일이다. 꿈은 자식의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는 책을 썼는데 꿈이 뭔가.
“정치를 시작했으니 (내년 총선에서) 재선 의원이 되는 게 가까운 꿈이다. 정치를 떠나 하고 싶은 것은 청년들이 꿈을 갖고 살도록 도와주고 싶다. 꿈이 중요하다고 말들 하지만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실천 전략을 주는 사람은 없다. 젊은이들에 도움을 줄 공부 프로그램과 캠프도 만들고 멘토링 사업도 하고 싶다.”

최상연 기자 choi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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