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사모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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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10면

‘예를 들면 선생님’의 부인인, 그러니까 우리가 ‘예를 들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분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올해 초였다. 감기에 좋다며 따뜻한 유자차를 내신 사모님은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한참 뜸을 들인 뒤 내 앞으로 노트 한 권을 건네셨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아무래도 김 선생이 맡아줬으면 해서.”
한동안은 ‘김군’이라 불렀는데 언젠가부터 호칭을 바꾸어 부르셨다. 그러시지 말라고 몇 번인가 간곡하게 청했는데도.
노트 맨 앞장에는 ‘예를 들면 사전’이란 제목이 적혀 있다. 활달하고 유려한 글씨 때문에 한눈에도 그것이 예를 들면 선생님의 노트란 걸 알 수 있었다.

“책으로 낼 수는 없겠지?”
말씀은 그래도 책으로 내고 싶으신 모양이다. 사모님 말씀처럼 노트는 책으로 내기에는 체계도 산만하고 글의 양도 부족하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한 것인지 구성과 문장을 갖추지 못한 글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는 사모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은 문학을 일종의 예시라고 생각했다. 주제의 예시. 따지고 보면 문학의 주제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예시는 얼마든지 다양하고 새롭게 또 풍성하게 나올 수 있다. ‘사랑의 영원함’이란 하나의 주제에서도 수없이 많은 노래가, 문학이 쏟아져 나온다.

조금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었다. 가령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예’ 역시 일종의 예시라는 것. 마음이니 도리니 하는 것은 바깥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데 ‘예’는 그런 마음과 도리를 알기 쉽게 밖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예시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동방예의지국의 예도 “예를 들다”의 예라는 주장에는 웃음이 나왔다.

선생은 예수를 세상에서 가장 예를 잘 든 ‘예를 들면 선생님’이라고 평가했다. 예수는 항상 비유와 예시로 설명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할 때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예수 자체를 하나의 예시라고 보았다. 사랑의 예시.

선생이 주장만 펼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만들고자 했던 사전은 간단한 정의와 그에 대한 예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몰두란 항목을 보면 이렇다.
몰두-생각이나 일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그래서 머리가 사라지는 현상.

예를 들면, 그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전철역을 나올 때도 그는 계속 그 생각을 했다. 예보대로 비가 내렸고 당연히 그는 2단 접이 우산을 폈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계속 골똘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5분은 족히 걸었을 것이다. 조금 이상한 것은 우산을 썼는데도 자꾸 비에 젖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는 거다. 기분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머리와 얼굴과 온몸이 비에 흠씬 젖어 있다는 걸 그는 알아차린다. 이상하다. 전철역을 나오면서 분명히 우산의 자동 버튼을 눌렀는데. 그러니까 그게 우산의 똑 단추를 풀지 않고 그냥 자동버튼만 눌렀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가지런하게 말린 2단 접이 우산을 든 채 비를 쫄딱 맞으며 5분 넘게 시내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곱게 화장하고 한껏 차려 입고서 말이다. ‘몰두’란 그런 것이다.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 묻어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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