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의 ‘마음아 아프지마’]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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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신경정신과 교수

친절 교육이 넘쳐나고 있다. 얼마나 친절한지가 그 사람의 상업적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 지 오래다. 최근 병원에서 ‘감성 노동자의 스트레스 관리’에 대한 특강을 요청받았다. 처음엔 ‘공감 커뮤니케이션’이란 제목으로 일반적인 얘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체 우리는 왜 친절해야 하는가.

 친절 교육의 목적이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대부분 즉각 대답이 나온다. “고객 만족도 증대를 위해서죠.”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좀 더 철학적인 말투로 ‘왜 친절해야 하느냐’고 다시 물으면 다들 몇 초 동안 입을 열지 못한다. 이성과 감성의 충돌이 있다는 얘기다.

 조금 기다려보면 나름대로 답을 내놓는다. 첫째 유형은 친절의 동기가 내부적인, 즉 정서적인 경우다. “웃는다는 건 내가 상대를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는 유형이다. 이들의 말 속엔 상대방이 나를 거절할까 봐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항상 웃고, 직장 내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쉽게 지치는 유형이다. 갑자기 회사를 그만둬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둘째 유형은 친절의 동기가 외부적이고, 생존과 관계된 경우다. “직장에서의 친절은 곧 일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들이다. ‘세련된 친절’에 능하지만 고객으로부터 너무 기계적으로 대한다는 불평을 듣기도 한다. 가장 흔한 부류이기도 하다. 친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셋째 유형이다. “내가 친절해야 남들도 나를 친절하게 대하죠”라고 말하는 부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직장에서 ‘친절 사원’으로 뽑히는 경우가 드물다. 친절에 대해 가장 자연스러운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친절한 사람은 아닌 이유는 뭘까. 이렇게 모두가 ‘친절’에 목을 매고 있는데 세상이 전보다 더 친절해졌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는 건 또 왜일까.

 며칠 동안 이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친절의 수요·공급에 불균형이 생긴 건 아닐까. 한 인간이 생산해낼 수 있는 ‘질 높은 친절’의 양은 그리 많지 않은데 친절이 상품화되면서 소비자가 요구하는 ‘양질의 친절’이 너무 늘어난 건 아닐까. 인간의 심리학적 착각을 이용하는 감성 마케팅도 이 같은 불균형을 부추기고 있다. 비행기를 타면 친절한 스튜어디스가 개인 비서가 돼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든다. 아파트에 입주하면 귀족 같은 대접을 받을 것 같고, 소주를 마시면 친절한 친구가 생길 것만 같다. 이렇게 친절이란 가치가 상품화되면서 사람들의 친절에 대한 열망은 중독환자의 금단증상처럼 격해지고 있다.

 점점 정교해지는 친절 교육도 ‘한정된 자원’인 친절을 심리학적 테크닉으로 부풀리고 있다. 당연히 부작용이 따른다. ‘기계적 친절’에 대한 짜증이 바로 그것이다. 서비스 직종에 있는 사람들이 자존심을 누르고 친절을 베풀어도 고객은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다. 기계적인 친절은 싫고, 순수하고 인간적인 친절을 달라는 것이다.

 성난 소비자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이런 말은 사회적 지위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속물적인 가치관에서 나온다.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유는 친절과 존중을 받기 위해서인데, 왜 나를 존중해주지 않느냐는 억울함과 좌절의 호소이기도 하다. 사회적 지위가 진정한 친절과 존중을 느끼는 데 되레 장애물이 된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산업사회가 시작되기 전 유럽의 가정에서는 해골·모래시계처럼 인간의 한계를 떠올리게 하는 바니타스(Vanitas) 미술품이 유행했다. 집에 장식된 미술품을 보면서 인생에 대한 목표를 하향 조정하는 지혜를 가졌던 것이다. 인간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존감을 높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자존감이란 인생의 목표 대비 성취한 것의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것을 이루는 것도 자존감을 높일 수 있지만, 인생의 목표를 조금 낮추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얘기다. 방법론적으론 후자가 더 튼실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낮추면 겸손해진다. 나를 지배하는 속물 소프트웨어에 겸손 바이러스를 심으란 얘기다. 톨스토이를 흉내내자면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은 지위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다.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에게 불친절한 곳을 찾아가보면 어떨까. 적어도 겸손은 훈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신경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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