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0세기 과학인물] 3. 자연과학 이태규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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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태규(李泰圭·1902∼92)
박사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과 깊은 인연을 맺은 학자다.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추천위원(65년)
에 오른 데다 그 자신이 역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李박사는 30년대 후반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아인슈타인·테일러·아이링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어울렸을 만큼 일찌기 이름을 날렸다.그가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48년 유타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

이른바‘리-아이링(Ree-Eyring)
’이론으로 불리는 학설을 세우면서 그는 세계 화학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리-아이링 중 리는 그의 성에서 따온 것.이 이론은 뉴턴역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던 분자세계를 방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는 세상을 뜨던 그 해까지 실험실을 떠나지 않은 학자로도 유명하다.아침 출근 새벽 1시 퇴근은 일본 교토대-프린스턴대-서울대-한국과학기술원을 거치면서 변함없이 지켜졌던 그의 연구 스타일이었다.

‘예리한 관찰과 꾸준한 노력’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에게 이같은 연구 습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동시대의 과학자들에게는 꿈꾸기도 힘들었던 3백여편의 논문 작성 기록은 이런 성실함이 뒷받침된 결과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이용태(李龍兌)
씨는“꼼꼼하고 자상했을 뿐더러 손자뻘인 제자들과의 토론도 즐긴 학자중의 학자”라고 회고했다.그는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초대 대한화학회장 등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李박사를 학문만 아는 학자로써 기억하지 않는다.그는 90평생중 50여년을 일본과 미국을 드나들며 살았다.

이 시기 그에게는 적지 않은 유혹이 있었다.50년대 미국시민권을 가지라는 주변의 유혹도 마다했다.앞서 일본 생활 때는 주변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했다.생전 인터뷰에서 가장 기쁜 일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李박사는“일제치하에서 독립했을 때”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몸으로 애국하고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한 노 과학자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창엽 기자<atmos@joongang.co.kr>

◇선정과정=자연과학(화학·수학)
분야에서 전문가그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최다 피추천자 1인을 선정.추천전문가:화학=서정헌·서세원(이상 서울대)
심상철·김성각(이상 과기원)
정성기·김기문(이상 포항공대)
,수학=명효철(고등과학원)
·고기형(과기원)
조영현·김성기(이상 서울대)
박용문(연세대)
·최윤성(포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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