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훈 “독도는 독도 … 지금은 일본 어루만져 줄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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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48)은 가수다. 울부짖는 고음과 튀는 무대가 전매특허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독도 수호전사란 별명이 따른다. 광고로, 공연으로 치열하게 ‘우리 땅’을 알렸다. 그래서 김장훈은 사회운동가다. 그에게 일본이란 어떤 존재일까. 적(敵)일까. 혹은 지독한 미움의 대상일까. 그리 봤다면 그건 껍질일 뿐이다. “독도는 ‘가시’ 같은 존재다.” 김장훈은 똑똑히 말했다. 그게 뽑힐 때 두 나라가 비로소 선린(善隣)을 말할 수 있다면서. 그래서 ‘동일본 대지진’ 참사를 누구보다 아파했다. 김장훈은 인간이다. 일본의 비극을 얘기할 때 그랬다.

글=김준술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나는 투사가 아니다

 지난 13일부터 김장훈은 뉴스의 화제에 섰다. 자신의 미니홈피에 한마디 던진 게 도화선이 됐다. “내가 독도를 사랑한다고 일본을 미워하진 않는다.” 그리고 “일본인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동일본 대지진 비극이 생긴 뒤 일부 네티즌은 떠들었다. “김장훈은 일본인들이 죽은 걸 좋아할 것”이라고.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당신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독도와 동해 지킴이 운동을 오래 해왔다. 그러나 일본을 싫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일본인 친구가 많다. 몇 안 되지만 일본에서 공연 보러 오는 팬도 있고. 가수지만 연예 뉴스는 안 본다. 대신 국제·경제·과학기술 기사는 샅샅이 읽는다. 원래 생각이 많다. 그러면 뭔가 보인다. 일본은 G2인 미국과 중국에 이어 G3로 밀린다.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4개국이 뜨고, 아프리카도 올라온다. 한국과 일본은 인구·자원으로 볼 때 갈수록 힘들어질 게 뻔하다. 손을 잡아야 살 수 있다. 그런데 ‘독도’가 가시다. 뭘 하려 해도 쉽지 않다. 그걸 뽑으면 친구처럼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 텐데.”

●일본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소린가.

 “기본적으로 인간끼린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지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참화를 고소해할 수 있나. 그래서 미니홈피를 통해 얘기했다. 그런 자세는 틀린 것이라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쁜 것’이라고.”

처참하게 파괴된 미야기현 나토리시. 맨발의 한 여성이 폐허 속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다. [나토리 로이터=뉴시스]

●대지진 전에도 일본을 그렇게 생각했나.

 “사실 내 나이가 돼서 ‘일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얘기하긴 쉽지 않다. 나도 어릴 때부터 머리에 각인됐다. 일본과 공산당은 나쁘다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구에 아시아권 국가만 사는 게 아니잖나.”

●독도가 가시라면 어떻게 빼야 하나.

 “우리가 독도를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문서적으로, 합법적으로 우리 땅이다. 그런 과거를 일본이 인정하면, 미래를 향해 손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양국 사이엔 뭔가 내려오는 끈끈한 게 있다. 외국 나가면 한국과 일본 애들이 가장 친하다. 빨리 싸움을 끝내야 한다. 경제 문제로 봐도 그렇다. 독도 근해엔 ‘불타는 얼음’으로 불리는 메탄 하이드레이트 자원이 30년치 매장돼 있다. 양국이 이런 걸로 각을 세워선 안 된다. 2차전지를 두고 세계적으로 패권 다툼이 심한데 이런 데서 힘을 더할 수 있지 않나. 희귀광물인 희토류도 그렇다. 그런 걸 대체하는 기술도 같이 연구할 수 있고.”

●이번 대지진 아픔을 위로하고, 인류애로 풀어 나가자는 한국인이 많다. 김장훈에게 인류애란 무엇인가.

 “그런 거창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일본만의 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세계 곳곳에서 지각변동이 잦아진다. 우리나라에도 규모 3~4의 지진이 일어난다. 남의 일만은 아니지 않나.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서로 맹목적인 미움 같은 게 존재한다. 그런 걸 없애야 한다. 올바른 얘기를 해도 잘 안 들릴 수 있다.”

 김장훈은 독도 지킴이 운동에서 ‘가시를 빼내자’는 속뜻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의 투사적(鬪士的) 모습만 부각시켰기 때문일까. “음악 하는 사람이 투쟁가도 아니고, 이번 미니홈피 발언 뒤에도 ‘따끔 충고 김장훈’, 이런 말이 나오던데 부담스러워요.”

●평소 남을 돕는 것도 그런 인간애가 뿌리인가. 기부왕으로도 유명한데, 일본은 구호 물자가 시급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번엔 돈은 아닌 것 같다. 이미 많은 분이 그렇게 돕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란 나라가 부(富)의 여력이 없는 나라도 아니고, 구호시스템도 어떤 곳보다 잘돼 있다. 그러나 침착하고 인내심 많은 국민성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사태를 추스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계속 힘을 낼 수 있는 응원과 메시지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감동적인 뭔가를 전달해 주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지금은 정부 차원의 도움이 이뤄진다. 곧 민간인들이 들어가 어루만져 주는 시점이 닥칠 것이다. 그때 대학생들과 들어가서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 있다. ‘좋은 일엔 안 가도, 나쁜 일엔 꼭 가라.’ 지금도 스태프며 경호원들 가족사까지 챙기는 이유다.”

 김장훈은 “아마 이달 말이나 다음 달에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명기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다케시마(독도)를 그들의 땅이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제가 구호활동을 아예 외면하진 않을 겁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죠. 대지진이 났다고 독도 운동을 안 하진 않죠. 아마 더 열심히 할 겁니다.” 독도를 지키는 것, 그런 애국이 일본을 돕는 인간애와 대척점에 있진 않다는 표현이었다.

 

공황증, 삶의 불씨를 깨우다

 김장훈은 지난 삼일절, 독도 앞바다에서 공연을 했다. “배에서 신경안정제와 수면제에 취해 계속 잤죠.” 파도가 높아 선박이 놀이기구 ‘자이로드롭’처럼 요동쳤다. 그에겐 두려움을 잘 못 견디는 ‘공황증’이 있다. “몇 분 안 돼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하더라고요. 기절한 것처럼 누워 있었더니 독도에 접안하고 있었어요.”

●독도의 첫 감흥은 어땠나.

 “진짜 생명체,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 가봤다. 독도가 내게 뭔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포스(force)’가 느껴지는. 야, 이런 곳을 놔두고 인간끼리 다툰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더라. 독도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빨리 이 싸움을 끝내자는 마음도 먹었다.”

●독도를 알리는 방식도 많이 바뀌지 않았나.

 “처음엔 영토임을 알렸다. 지금은 관광 컨셉트로 접근한다. 대한민국에 섬이 3800개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섬의 나라 한국을 방문하라는 것이다. 한국 홍보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객원교수와 함께 만든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전광판 광고에도 그런 내용으로 독도를 알렸다. 사실 내가 신경 쓰는 건 학계를 지원하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라는 고지도 같은 게 공개되면 그걸 알리기 위해 지원하는 일이다.”

●독도 공연처럼 힘든 일을 사서 고생하나.

 “사실 ‘개고생’이다, 그게. 신념이 없으면 못 한다. 사실 내가 ‘공황증’이 있다. 다른 말로 ‘염려증’이다. 나쁘게 얘기하면 걱정이 많고, 좋게 보면 시뮬레이션을 많이 한다. 길거리 가다 ‘간판 자세’가 불안하면 바로잡아야 마음이 놓인다. 과거 공연하다 크게 다치면서 극단적으로 심해졌다. 관객에게 좋아하는 가수가 울부짖으며 실려 나가는 걸 보여주는 건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준비하고 연습하고 이런 것을 심하게….”

●공황증은 언제 시작됐나.

 “갑자기 내 노래가 전처럼 슬프지 않다고 느꼈다. 등 따시고, 배불러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삶이 절박하지 않으니, 노래도 그런 것 같았다. 단돈 3000달러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갔다. 그때가 2003년 봄이었다. 지인 집에서 얹혀 살다, 한인타운의 한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고통스러운 시절이었겠다.

 “공연을 굉장히 많이 봤다. 의욕이 생기더라.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하고.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갈망도 떠올랐다. 혼자 바닷가에서 고민도 했다. 저기 건너면… 내 나라가 있는데. 다시 한국에 가면 ‘보너스 인생’이라 여기고 살겠다고 약속했다. 불꽃처럼 삶을 태우자고. 독도 운동이며 기부 같은 것의 뿌리도 그때 더 여물어진 것 아닐까.”

몽땅 몰아주는 게 기부가 아니다

 ‘기부왕’. 김장훈에게 붙는 다른 수식어다. 12년간 80억원을 기부했다. 돈 버는 족족 남 주는 데 보탠다. 작심하고 물었다.

●병적(病的)인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연예인 망언’ 시리즈에 들어갈 텐데… 원래 유전자가 그렇다, 하하. 기부라는 게 측은지심에서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길 가다 불쌍한 사람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돈 벌어서 기부하는 건가, 기부하려고 돈을 버는 건가.

 “내 옷을 봐라. 명품이다. 지금 입은 것 합쳐도 꽤 돈이 든다. 가족과 스태프도 열심히 챙긴다. 최근 공연하고 회식하는 데 800만원 냈다. 내 것도 챙긴다는 얘기다. 기부는 나눠 쓴다는 의미다. 내가 돈 없을 때 남들이 밥을 사줬다. 그 친구들이 만원이 있으면 그걸 다 쓰진 않았을 거다. 기부는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다. 그걸로 기부하는 건 진짜 쉽다. 자원봉사나 그런 도움을 업으로 하는 분을 보면 90도로 인사한다. 그분들 유전자가 진짜다.”

●수입이며 통장 관리는 직접 하나.

 “사실 통장번호도 모르고 비밀번호도 모른다. 기획사 대표가 관리한다. 그 사람이 장난 한번 치면 나는 완전히 망한다는, 하하. 내가 공황증도 있는데 그런 계산까지 다하고 살면… 가수로서 지금까지 못 왔을 거다. 원래 어렸을 땐 철저하게 장사꾼 기질이 있었다. 노래를 하면서 바뀌더라.”

●모친이 목회자인데 남 돕는 것도 영향을 받았나.

 “엄마 영향은 진짜 많이 받았다. 비겁하고 치사하게 살면 안 된다는 말은 지금도 가슴에 새겨져 있다. 70대 중반이신데 지금도 일이 막히면 마지막에 상의 드리는 분이다. 엄마가 멘토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월세 아파트엔 언제까지 살 건가.

 “지금도 타워팰리스 살 수 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이 좁은 땅에서 어떻게 다 집을 사느냐’고 생각했다. 집이 행복의 조건인 양 그걸 위해 가족이 의식주 수준을 낮춰서 살 필요가 있나. 지금 시프트(shift·장기전세주택) 홍보모델을 하는 것도 그런 생각에서다. 지금 내는 월세는 180만원이다. 사실 럭셔리한 삶이다. 남들에겐 큰돈인데.”

●남들 다 주면 노후는 어떻게 하나. 가수도 기한이 있을 텐데.

 “연금보험에 들었다. 나도 속물인지라, 60세 넘어서 가족과 후배들 술·밥 못 사주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싶진 않다.”

●바둑도 좋아한다는데 인생의 묘수(妙手)라도 배운 게 있는지.

 “아마 1급이다. 뭔가 포기할 때 안 아픈 척하고 그만두는 법을 배웠다. 질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실제로 아프지 않다.”

j칵테일 >> 6개월마다 ‘절규’ 하는 김장훈

“가수가 노래나 열심히 하지.” 김장훈을 두고 이런 소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도 고민한다. “사회적인 일을 열심히 벌일수록, 가수로서의 입지는 작게 느껴진다. 노래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김장훈은 “그래서 음악적으론 아끼는 게 없다. 공연할 때 양과 질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가수로서 그런 각오와 자신감이 다른 일에도 에너지를 선물했다고 했다. ‘독도 지킴이’며 ‘기부천사’ 타이틀을 가능케 했던 힘 말이다.

●김장훈 노래를 정의한다면.

 “기술은 잘하고 못하고 따질 수 있다. 예술은 아니다. 마음을 울리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가수도 기교와 실력이 모두 다르다. 나는 안에 있는 본능을 직접 끄집어내서, 원초적으로 표현하는 걸 추구한다.”

●요즘 세태와는 다른 방식 아닌가.

 “롤 모델이 있다. 고(故) 김현식씨, 전인권씨, 그룹 에어로스미스 등이다. 지금은 정통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거의 없다. 틀을 좁히면 가수도, 관객도 결국 피해를 본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뭔가.

 “관객이 군주다, 군주. 다양한 퍼포먼스와 노래를 통해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다. 와이어·크레인·스크린 등 공연 인프라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많이 노력했다. 공연에서 노래만 했으면 건물을 석 채는 샀을 거다. 빅뱅·에픽하이·이소라 공연 연출도 해봤다. 원래 연출자는 사람들 뒤통수를 보며 일한다. 나는 가수이기도 하다. 무대 앞에서 관객 표정을 직접 접한다. 아, 이런 것에 사람들이 환호하는구나, 그게 뭔지 안다.”

●치열하게 사는데 삶이 피곤하진 않나.

 “나는 무대 위와 밖, 세상을 둘로 나눈다. 공연에 몰두하다 보면 6개월 주기로 거의 미칠 때가 온다. 보름간 서른 번 넘게 술을 마신다. 사람들이 볼 땐 ‘유흥’이지만 내가 볼 땐 ‘절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면 또 절제와 절도 있는 생활로 돌아간다. 소개팅도 많이 한다. 주변 사람들이 ‘김장훈 결추위(결혼추진위원회)’도 만들었다, 하하.”

j칵테일 >> 숫자로 보는 김장훈

2008년 KAIST의 선택 2005년부터 KAIST 기계공학부 오준호 박사와 무대장치를 제작했다. 오 박사는 ‘휴보’를 만든 로봇계 대부다. 2008년 김장훈 공연을 보고 감명받은 배순훈 전 부총장의 요청으로 기계공학부 전공선택 과목으로 수업이 이뤄졌다.

80억원 1998년부터 불우 어린이 돕기로 시작한 기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기부액은 80억원에 이른다. 서해안 기름 유출사고 땐 10억원을 내놓았고 현지에서 11번 기름을 닦았다.

2000회 공연 김장훈은 ‘공연의 사나이’다. 개인 공연만 2000번을 돌파했다. 91년에 데뷔해 9장의 정규앨범을 냈다. ‘나와 같다면’ ‘난 남자다’ 등 20여 개의 히트곡이 있다. 이소룡을 좋아해 공연 때 중국식 무협의상을 입고 하는 발차기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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