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95)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대화 3

나: 그럼 내 정강뼈도…….
말굽: 이제 알아차렸네 그려. 자네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린 실체는 알고 보면 나였어. 사과할 밖에. 그래도 다행이라 여기게. 부대장의 특기는 발차기야. 정강이뼈를 차는 건 일종의 유인책에 불과해. 정강이뼈를 차고 나면 다음엔 바람같이 뛰어올라 머리를 차거나 쇄골, 목뼈를 차는 게 순서거든. 그가 뛰어올라 발길을 날릴 때는 뭐랄까, 마치 새가 깃을 차고 오르는 것 같았네. 미학적이지. 구두 뒤축의 말굽은 근육이 그 타격을 그나마 일부 흡수하지만 구두 앞부리에 장착된 말굽은 그대로 뼈를 작살내고 말아. 목뼈나 쇄골의 신경조직이 손상되면 전신이 마비돼.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네. 내가 자네의 목으로 날아올랐다면 자네는 지금쯤 전신마비로 누워 지내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맞네! 사실이야! 나는 원래 그 부대장의 말굽이었어. 오랫동안 살인을 위한 그의 도구, 그의 분신으로 지냈었지. 그가 끝내 나를 버렸으므로, 자네한테 이사 간 것뿐이야.
나: 믿을 수 없어!

<나는 벌떡 일어나 발작적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물론 말굽을 나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다. 아직 새순이 다 돋아 나온 건 아니지만 이미 훈풍에 몸을 내맡긴 숲은 봄철의 향기로 가득하다. 나는 관음봉의 허리께를 빠르게 더듬어 명안진사 쪽으로 간다.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이사장의, 아니 부대장의 말굽이 어떻게 내 손바닥으로 이사해왔단 말인가. 명안진사가 내려다보이는 암벽 위에 앉는다. 가쁜 숨소리만이 들리는 밤이다. 몇몇 외등에 둘러싸인 명안진사는 별과 별 사이처럼 적막하고 아득하다. 소나무로 명안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같다.>

나: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굽: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는 거 알아.
나: 나는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있었어. 나는 잊고 싶었고, 그래서 다 잊었지. 이곳은 물론 이곳에서 겪었던 일조차 모두 지워지더라고. 두들겨 맞는 것은 오랜 내 직업이었어. 나중엔 맨살이 나의 갑옷이 된 거 같았어. 아무리 맞아도 감각이 없는 상태까지 갔지. 폭력에서 중독은 두 가지야.
말굽: 때리는 중독, 맞는 중독!
나: 나는…… 때리는 중독자를 아버지로, 맞는 중독자를 어머니로 삼고 태어났어. 내겐 그들이 관음이고 세지였을지도 몰라.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모든 기억이 아주 흐릿하지만, 누구는 늘 때리고 누구는 늘 맞았는데……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였다고 인식한 건 최근이야. 아버지와 어머니에겐 그것이 너의 말처럼 일종의 파티였나 봐. 또 모르지, 파티가 아니라 스포츠, 혹은 쾌락을 위한 섹스 같은 것이었을지도. 집에서만 그런 건 아냐. 학교에서도 그랬고, 골목길에서도 그랬지. 나같이 돈 없고 공부도 못하는 애들은 맞으려고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선생들은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당신들 안의 폭력성을 발휘할 표적을 골라내는 데 놀라운 후각을 갖고 있어.

선생한테도 맞고 힘 있거나 뒷배가 좋은 애들한테도 맞지. 맞은 애들은,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어린 강아지 새끼를 밟아 죽이거나 병아리 따위를 돌로 쳐서 죽여. 잘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자를 고르기도 하고. 나도 그랬어. 학교에서 많이 두들겨 맞고 온 날, 새끼 강아지를 안고 나가 절벽 위에서 떨어뜨려 죽인 적도 있어. 폭력에도 먹이사슬이 있거든. 이를테면 우리 어머니는, 그 폭력의 먹이 사슬에서 나처럼, 가장 낮은 층위에 있었을 거야. 어머니가 죽고 난 다음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해봤어. 표적이 없어졌으니까. 아버지는 힘은 좋았지만 한 가지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야.

세상으로부터, 두들겨 맞은 적도 많았겠지. 그러니 아버지에게도 두들겨 패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거라고 봐. 어머니가 죽고 나자, 어머니 대신 때려잡기 위해서, 그러니까 오직 파티를 즐기려고, 개를 키우기로 했던 것일지도 몰라. 개는 때려잡아야 맛있다는 명분까지 있는걸. 개를 목매달아 놓고 혼자 때려잡는 아버지 눈빛에 어떤 짜릿함이 지나가는 걸 본 적도 많아. 어머니를 때릴 때 그랬듯이. 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개인 것 같았고, 실제 개라고 생각했어. 맞아 죽어가는 개가 돼서…… 어떤 쾌감을…… 나도 느꼈지. 내 자신, 목이 졸리고 온몸을 두들겨 맞아서 얻는 희열 같은 것. 집에서조차 나는 정서적으로 어느덧 어머니의 역할, 개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그가 나타났어.

부대장.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물러나 그가 갖가지 방법으로 개를 죽이는 것을 보는 입장이 됐어. 당신의 쾌락을 그에게 빼앗겨야 했을 뿐 아니라, 그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매 순간마다 뼈저리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알아.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은 것은 내가 방화범으로 몰려 감옥에 갔기 때문이 아니야. 더 강한 자를 만나면, 그에게 굴종하거나 자기를 지워버리거나 할 수밖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는 이곳에 돌아올 필요가 없어졌어. 어차피 무허가였던 집도 이미 남아 있지 않았었고. 그래서 떠났고 그래서 다 잊은 거야. 네가 내 손바닥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남해바다를 흘러 다니면서 잘 지내고 있었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왜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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