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94)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대화 2

나: <놀란 눈으로>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말굽: <웃고> 나한테까지 후훗, 연기할 생각은 마. 다들 그래. 이런 얘기를 남에게 들으면 놀란 척하거든. 습관으로 길들여진 연기(演技)가 절로 나와. 자네까지 그렇다니 웃겨. 자네는 이미 나를 따라 짐승이 됐지 않나. 아니, 짐승이라면, 언짢은가. 짐승이라니, 내 실언이었네. 사람은 그렇지, 누구나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즐기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봐. 개인이나 집단이나 뭐 국가나, 다 마찬가지야. 그 특수부대만 해도 그래. 전무후무한 존재가 아니거든. 유사 이래, 그런 부대는 늘 있어왔네. 자고로 살인의 가장 통 큰 컨설턴트는 국가라고 할 수 있어. 그에 비해선 새 발의 피라 하겠지만, 어쨌든 엽기적 살인마 전통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안 그런가.

놀라는 척한다고 해서 폭력과 살인의 그 길고 뚜렷한 역사로부터 빠져나와지는 건 아니야. 그것이 지워지는 건 더더욱 아니고. 법의 안과 밖에서, 명분과 욕망 사이에서, 심지어 자비와 눈물 사이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폭력과 살인을 즐기고 있어. 돈만 많으면 노비를 사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는 세상이지. 이를테면 야구방망이로 한 대 맞는데 백만 원, 뭐 이런 식으로. 때릴 놈 맞을 놈 줄을 설 거라고 봐. 그 특수부대 안에서 벌어진 일들도 말하자면, 수천 년 동안 반복돼온, 지금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하나의 파티 같은 것이야. 그 파티로부터 혼자 빠져나갈 길은 없어. 자네의 파티도 이미 시작됐는걸. 보라고. 샹들리에는 눈부시고, 반라의 본드걸들도 넘치고, 포도주는 붉게 익었네. 그러니 즐겨. 자넨 멋진 주인공이 될 수 있네. 연미복의 맵시를 가다듬는 게 지금 자네가 할 일이야.

나: 그 부대장에게 차여 정강이가 나간 적이 있었어.
말굽: <또 낄낄대며> 알지. 알고말고.
나: 네가 어떻게? 너무 아는 척하려고 하지 마, 겨우 말굽인 주제에. 나도 너 이상으로 그 부대장을 알고 있어. 주말마다 똘마니 교관들과 함께 우리 집에 들러 개를 직접 잡아먹고 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머리가 빠지지도 않았고 얼굴 주름살도 없었네. 자네 말을 듣다 보니, 그 자가 개고기를 좋아해서 왔던 건지, 산개를 잡아 죽이는 재미를 사려고 왔던 건지는 오리무중이네만. 그는 온갖 방법으로 개를 죽였어. 몽둥이로 때려잡는 건 뭐 기본이고, 산 채 불에 태우거나 목에 칼을 박아 넣기도 했네. 심장을 찾아 꺼내고, 결박한 개의 껍데기를 산 채로 벗긴 적도 있었어. 위대한 미국의 건설은 인디언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면서. 끔찍했지. 매달아놓은 개의 목줄을 그 자가 한눈파는 사이에 내가 풀어준 일이 있었다고. 그 자가 개한테 물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개도 결국은 박살나고 나도 개박살났지만 말야. 그자의 발길질 한 번에 내 정강이뼈가 동강났네. 정말 위력적인 발길질이었어. 두 달이나 깁스를 해야 했지.

말굽: 미안해. 내 사과하지, 자네 정강이뼈한테.
나: 네가 사과할 건 없어.
말굽: 사과해야지. 자네의 정강이뼈를 박살낸 건 그 부대장이 아니라 바로 나야. 나라고. 사과할 밖에.
나: 뭔 개소리야?
말굽: 날 봐. 보라고. <내가 몸을 기울여 말굽을 보고 난 후에> 자네도 본 적이 있을 텐데, 낯이 익지 않나? 나는 기성품으로 만든 말굽이 아니야. 아니 뭐 말에 신기는 말굽도 아니고. 구두굽이라 하는 게 더 가깝겠지. 부대장은 우선 대장간에 가서 자신이 설계한 대로 쇠말굽을 두 개 맞춰 왔네. 자네가 본대로, 하나의 말굽은, 자네 왼손바닥에 자리 잡은 그것은, 얇은 대신 끝이 뾰족뾰족하게 제작됐어. 부대장은 그걸 가지고 신발제작 업자를 찾아갔지. 부대장은 원래부터 자신이 신는 전용 전투화를 맞춰다 신었어. 전용전투화에 새로 제작한 말굽이 장착됐지. 하나는 뒷굽에 교묘히 장착됐고 하나는 앞부리에 숨겨져 제작됐네. 끝이 뾰족뾰족한 얇은 말굽은 앞부리용이야. 말하자면, 앞부리용 말굽은 찌르기용으로서 일종의 창이고, 뒷굽에 숨긴 것은 타격용이지. 제석궁에서의 자네는 정말 웃겼어. 아무것도 모르고 양손을 마구 흔들어댔으니까. 자세히 좀 들여다봐. 오른손보다 왼손의 손가락이 더 빨리 닳아 없어지는 걸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나. 더 짧아지면 끝에서 창날이 조금씩 드러날 거야. 왼손은 창으로 쓰게. 그것으로 찌르듯이 정강이뼈를 가격해봐. 나가 자빠지지 않는 자가 없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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