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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해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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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곽재원
과학기술 대기자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뿐인데 권선징악이나 종교적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인간은 또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기도를 합니다. 저에게 제2의 고향이며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지인이 함께하는 땅. 안타까움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게 업(業)일까요. 업을 이해하기엔 너무 가혹한 초봄입니다.”

 20대 초반의 유학기를 포함해 30여 년 일본 생활을 해오고 있는 한국인 친구로부터 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며칠째 가슴을 저미게 한다.

 1995년 1월 17일 새벽을 덮친 고베(神戶) 대지진이 떠올랐다. 당시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기자는 현지에 급파돼 참상을 그대로 목격했다. 땅을 흔들며 다가오는 여진의 공포를 느낄 사이도 없이 시신 발굴과 화재로 몸이 오그라진 시신들을 수습하는 현장을 수없이 뛰어다녔다. 대피소로 이용된 한 초등학교의 강당을 취재할 때 왈칵 눈물이 났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강당 벽에 걸린 ‘와다시노 유메(私の夢·나의 꿈)’라고 삐뚤빼뚤 쓴 초등학생들의 붓글씨를 본 것이다. 아이들 대다수가 행방불명됐다고 했다. 도대체 이처럼 순수한 초록동무들의 새해 꿈을 누가 빼앗아 갔는가.

 일본 동북부를 휩쓴 이번 지진은 산리쿠(三陸) 앞바다에서 발생했다. 산리쿠는 과거 리쿠젠(陸前), 리쿠쭈(陸中), 무쓰(陸奧)로 불렸던 곳으로 지금의 미야기현, 이와테현, 아오모리현의 해안 지방을 말한다. 일본 열도를 따라 태평양으로 흐르는 난류인 일본해류와 일본 동해안을 남쪽으로 흐르는 한류인 쿠릴해류가 만나는 최고 좋은 어장이다. 그러나 이 굴곡 넘친 지형이 오히려 일단 쓰나미가 발생하면 그 파고를 증폭시키는 원인이 된다. 지진이 발생하기 8일 전 이 지역 사람들은 지진대피 훈련을 대대적으로 했다. 30년 내 규모 7.5~8도 발생 확률이 99%라는 예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산리쿠 지역 500만 명과 후쿠시마, 이바라키까지 합쳐 약 1000만 명이 사는 지역이 한순간에 당했다.

 지금 일본인들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위로해도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뿐이다. 그러나 절망 뒤에는 늘 희망이 존재한다. 6400여 명이 사망했고, 10조 엔(약 130조원) 상당의 피해를 겪은 고베는 첨단 패션시티로 발돋움하고 있고, 앞바다를 메우며 인공섬을 개발해 세계 최고의 의료연구센터를 건설하고 있다.

 미국 여류작가인 레베카 솔닛은 최신작 ‘재해 유토피아’에서 재해 후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대재해가 일어나면 질서 부재로 폭동, 약탈 등이 만연한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샌프란시스코 지진(1906년) 등 여러 사례를 들어 실제로는 재해 후 피해자들 사이에 금방 상호부조(扶助)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했다. 인간성에 바탕한 자연치유다. 고베 출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진 후 고베에 관한 연작 소설을 썼지만 지진 참상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그런 유토피아를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 국민들이 일심동체가 돼 침착하게 재해복구를 해나가는 모습에서 새 희망을 발견한다.

곽재원 과학기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