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징벌적 배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은 기원전 1750년께 설형문자로 쓰인 성문법(成文法·written law)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고 만든 법이다. 1947년 이것보다 약 200년 앞선 ‘리피트-이시타르 법전’이 발견되면서 함무라비 법전은 최고(最古)라는 타이틀을 반납했다. 전문과 후문 외 282개 조로 구성된 함무라비 법전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 또는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라고 한다. 고조선의 8조법에도 이런 조항이 하나 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이다. 가해자에게 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도록 한 벌은 이처럼 역사가 깊다. 이런 정신은 훗날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륙법의 바탕이 됐다. 민사소송에서 손해를 끼친 액수만큼 물어주도록 하는 이른바 ‘보상적 손해배상’이다.

 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이 정도로는 죄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봤다. 그래서 탄생한 게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이다. 피해자가 당한 금액보다 훨씬 무겁게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이다. 1760년대 영국 법원의 판결에서 비롯됐으며 이후 미국에서 도입했다. 대표적인 판례가 ‘윌리엄스 대 필립모리스’의 담배 소송이다. 2009년 3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10년간 필립모리스의 세 번째 상고를 기각하면서 흡연으로 인한 폐암 사망자 윌리엄스 유족에게 795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최종 판결했다.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 우리 민법도 실손해액 배상원칙이다. 대기업의 횡포를 줄이기 위해서는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중소기업계의 주장에 공정거래위원회가 반대해 온 이유다. 그런데 지난주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챈 대기업에 피해액의 3배를 배상하도록 하는 하도급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올해부터 김동수 위원장이 공정거래위를 맡은 뒤 일어난 변화 중 하나다.

 이전에 징벌적 배상이 적용되고 있는 법도 있다. 유권자가 후보자로부터 금품·향응을 받은 것이 적발될 경우 그 금액의 50배까지 과태료를 물리는 공직선거법이다. 3배 배상제도에 대해 대기업들은 “내년 총선을 겨냥한 한나라당의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하청기업이 애써 개발한 기술을 슬쩍하는 비열한 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대기업들이 자초(自招)했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심상복 논설위원

▶ [분수대] 더 보기
▶ [한·영 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