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금융시장 고정관념 깬 ‘온라인 대출 장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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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전문가일수록 자기의 지식을 내려놓기 어렵다. 많은 지식과 경험은 자기만의 관념을 만들어 낸다. 관념은 반복되며 마침내 움직이지 않는 고정관념이 된다. 때로 고정관념의 감옥 안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전문가가 스스로 파는 위험한 함정이다.

 금융산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금융이야말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업무 특성 때문에 생각은 더욱 굳어지기 쉽다. 금융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많이 알고 가장 일을 잘한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마련이다. 신용보증기관의 최고경영자(CEO)로 일하면서 가장 경계해 온 점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신용보증기금이라는 금융기관에서 고객과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제도를 고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새로운 대안으로 제도를 개발하고 시스템을 설치하는 작업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마땅히 기본에서 다시 출발했다. 우선 보증심사의 근본적인 틀을 뜯어고쳤다. 보증금액 결정에 기초가 되는 기업의 매출액을 과거 실적치에서 미래 추정치로 대체했다. 기업평가 전문기관 내부에 30년 동안 고착됐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온라인 대출장터’도 개설, 대출 금리가 시장에서 합리적 수준에서 결정되도록 ‘판’을 마련했다. 대출장터는 중소기업이 움직인다. 우선 중소기업은 자신이 원하는 대출정보를 장터에 올린다. 이어 은행들은 기업의 신용도 등을 살펴본 뒤 대출 금리를 제시한다. 이때 서로 조건에 맞으면 대출이 성사된다. 상호 호혜적인 쌍방향 거래 시스템인 셈이다.

 이전에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금리를 은행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 왔다. 힘이 없는 중소기업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결정권을 가진 은행이 정해 놓은 이자율대로 납부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온라인 대출장터’에서는 입장이 바뀌었다. 중소기업은 여러 곳의 은행을 비교해 보고 유불리를 따져 볼 수 있다. 각 은행이 제시한 금리 등 대출조건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 은행을 고를 수 있다. 이제 은행의 시혜를 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당당한 은행의 거래 고객으로서 응분의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출장터가 개설되자 기업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의외로 금융기관의 호응도 컸다. 장터가 개설된 뒤 한 달 만에 1000건이 넘는 중소기업들의 대출 희망 정보가 등록됐을 정도다. 금융기관 역시 하루 평균 50여 개 영업점이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중소기업 대출 금리가 실시간으로 파악되니 정책적인 효과마저 부수적으로 거둘 수 있겠다는 평가다.

 전문가 집단일수록 자신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심지어 가장 잘할 수 있다며 만용을 부린다. 그 때문에 더 큰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 알고 있는 지식·경험·관행일수록 현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자꾸 돌아보는 지혜가 요구된다.

 옛말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고정관념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우선 스스로 파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비로소 창조적인 혁신적 도전을 멈추지 않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앞에 활짝 펼쳐질 희망찬 미래를 위해.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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