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걱정되지만 내 할 일 하러 출근했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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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기현 게센누마시에서 12일 오후 한 구조대원이 나이 든 여성 피해자를 등에 업고 나오고 있다. [교도뉴스 AP=연합뉴스]

11일 오후 2시45분쯤 기자는 일본 열도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미야기(宮城)현의 바로 옆에 있는 아키타(秋田)현 다카시미즈(高淸水) 주유 공장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호주머니 안 휴대전화에서 ‘삐-삐-삐-’ 하는 연속음이 들렸다. 휴대전화를 들자 “미야기에서 매우 강한 지진을 예상, 즉각 대피 요망”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일본 기상청이 2년 전 시작한 ‘재해 예보 사전 알림’ 벨이 울린 것이다.

“어, 이게 뭐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 지 10초도 안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땅 전체가 엄청나게 흔들리는 느낌에 책상을 붙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공장 구조를 설명하던 가토(55) 공장장은 얼굴이 하얗게 변한 채 “으악, 으악”을 연발했다. 순식간에 전기도 나갔다. 긴급 상황이라는 생각에 곳곳에 전화를 돌렸지만 어디도 연결되지 않았다. 통신이 완전 단절된 것이다. 공장 밖으로 뛰쳐나온 모로하시 마사히로(諸橋正弘·61) 다카시미즈사 대표는 “태어나 이런 흔들림은 처음”이라며 경악했다.

취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승용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 눈앞에서 지옥이 열리고 있었다. 신호등은 모두 꺼졌고 어딘가에서 불이 난 듯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TV를 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다행히 승용차 라디오를 통해 아키타현 바로 옆 미야기현에서 규모 8.4(나중에 8.8로 수정됨)의 큰 지진이 났고, 쓰나미 경보가 발령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지나자 도로는 밀려나온 차들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해가 지자 아키타는 암흑 도시로 변했다. 시내 편의점마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길게 늘어섰지만 쑥대밭이 된 점포 안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도로 곳곳이 무너져 내려 차단되는 바람에 100m를 움직이는 데 2시간 넘게 걸렸다. 일단 인근 호텔로 들어갔으나 체크인 자체가 안 됐다. 수도도 완전히 끊기고 정전으로 방이 암흑이니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래도 손님 50여 명이 질서를 지키며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키타 시내의 모든 식당도 문을 닫았다. 굶을 수밖에 없었다. 암흑으로 변한 호텔의 유일한 빛은 프런트 데스크의 촛불뿐이었다. 호텔 손님들은 로비에서 수건이나 옷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2~5층의 호텔 복도에 웅크린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오전 4시30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인근 니가타(新潟)현에서 발생한 규모 6의 지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 투숙객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뛰지도 않고 살금살금 어둠 속을 걸어 나와 밖으로 대피하는 모습이었다.

오전 5시,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미야기현으로 가기 위해 아키타역으로 향했다. 차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아키타역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모든 방향으로 가는 열차들의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50분을 달려 공항으로 갔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야기현·센다이(仙台)·도쿄(東京)·나고야(名古屋) 등 모든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 편은 정전으로 인해 모두 결항이었다. 발전소에 문제가 발생한 데다 그나마 있는 비상전력도 병원 등 응급시설로 돌리는 바람에 공항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언제 다시 비행기가 뜰지 기약할 수 없다는 안내였다.

공항 렌터카 사무실에서 차를 빌리려 했지만 “컴퓨터가 작동되지 않아 차를 내보낼 수 없다” “빌려 나간 차들이 모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지만 한 직원은 “지금 빌려 주면 사고 위험이 크니 업무를 중단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공항 안에 있는 매점에도 음식물이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비행기를 타지 못한 승객들은 “일단 휴대전화 충전이라도 하자”며 자동판매기 등 자가발전시설의 콘센트에 몰려 휴대전화를 충전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공항 측은 ‘재해 상황’이라며 공중전화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줬다. 무척 고마웠다.

공항에서 청소 일을 하는 한 60대 여성은 “아이들이 센다이에서 살고 있는데, 쓰나미로 어떻게 됐는지 통 연락이 안 된다”며 발을 동동 굴렸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출근했다고 말했다.

결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속속 이어졌지만 웅성거리거나 항의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보고, 모든 일정이 뒤죽박죽이 됐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언론의 보도도 흥분하기보단 차분한 쪽이다. 이번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과 일본 국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피해를 봤다. 앞으로 일본인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알 수 없다. 이번 재난은 흔들리던 일본과 일본인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길 바란다.

아키타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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