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라누프 원유시설 폭격 … 카다피 ‘석유 인질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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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9일(현지시간) 리비아 동부 빈 자와디의 한 원유 저장소가 카다피군의 폭격을 받아 불타고 있다.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는 현장을 무장한 시민군 차량이 지나고 있다. 카다피군은 이날 라스라누프와 빈자와디 등 원유시설 밀집지역에 공습을 가했다. [빈 자와디 로이터=뉴시스]

10일(현지시간) 오후 1시30분쯤 리비아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라스라누프 서쪽 방어선 상공에 전투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나타났다.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Qaddafi) 친위군의 전투기였다. 시민군이 콩 볶듯이 대공화기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기자는 모래언덕에 고개를 숙이고 공습을 피하려 했다. 그러자 시민군 한 명이 “차 근처가 더 안전하다”며 기자를 차 뒤편으로 이끌었다. 시민군은 5분간 대공포 수백 발을 퍼부었다. 전투기가 사라지고 방어선 전방 1㎞ 지점에 흰색 연기가 피어오르자 시민군은 “앞에 있는 민가가 폭격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상황은 오후 내내 수차례 반복됐다.

 카다피 친위군은 9일과 10일 이틀 연속 라스라누프 등 동부 원유시설을 폭격했다. AP통신 등 외신은 카다피군이 이날 라스라누프에서 서쪽으로 5㎞ 떨어진 시민군 진지에 20여 개의 폭탄을 투하해 인근 시드라 원유 시설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교전 과정에서 4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군 측은 “카다피군이 라스라누프 지역의 원유 파이프라인과 저장소를 집중 공격했다”며 국제사회에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다피 측은 원유시설 폭격을 부인했다. 리비아 사태가 원유시설 폭격으로 치달으면서 유가 상승 우려가 커지고 있다. 9일 영국 런던 국제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북해산 브렌트유는 2.5%(2.88달러) 오른 배럴(158.9L)당 115.94달러에 거래됐고, 10일에는 장중 116달러를 돌파했다.

 카다피군의 원유시설 폭격은 의도된 군사 작전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경제제재와 무기수출 금지, 해상 봉쇄 등 국제사회 압박이 거세지자 카다피가 석유를 대외 협박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리비아는 세계 원유 공급량의 2%를 생산하는 세계 12위 석유 수출국이다. 리비아가 석유 공급을 중단할 경우 국제 유가가 140∼150달러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리비아 국영석유공사에 따르면 현재 리비아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기존 160만 배럴에서 50만 배럴로 급감했다.

 내부적으로는 리비아 석유 생산시설의 80%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진 시민군에 대한 위협용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카다피가 막대한 석유 판매 수입을 군대 유지와 용병 고용 등 권력 유지를 위한 돈줄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석유시설을 마구잡이로 파괴하지는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카다피군과 시민군은 서부 자위야와 동부 라스라누프 등 전략 요충지를 중심으로 치열한 혼전을 거듭하고 있다. 시민군은 이날 카다피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라스라누프를 지켜냈다. 자위야에서는 양측의 교전으로 40명 이상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카다피군 장성과 대령이 포함됐다고 알자지라 방송이 보도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10일 리비아 시민군을 대표하는 국가위원회를 리비아 국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리비아 반정부 세력 지도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국가는 프랑스가 처음이다. 헝가리도 이날 리비아 국가위원회를 리비아의 실질적인 대표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라스라누프(리비아)=이상언 특파원, 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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