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⑫ 보령제약의 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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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1992년 중국에 완제품으로 첫 수출된 겔포스.

1980년대 말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측근이자 의사 출신 정치인인 비타리 코로티치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소재가 불분명해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초비상이 걸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코로비치는 나와 함께 보령제약 반월공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정보부서 사람들 사이에서 “보령제약이 뭐하는 데냐”라는 불평 반 궁금증 반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내가 직접 소련과 중국을 방문해 수출계획을 수립하고, 소련과 중국의 각계 인사들을 연이어 보령제약으로 초청한 결과였다.

 이는 84년 보령제약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고혈압 치료제 ‘캡토프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제품은 곧바로 선진 각국으로부터 18건의 특허를 획득하며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제품이다.

특히 한국과 미국 간 통상 문제로까지 비화된 가운데 오리지널 특허를 갖고 있던 미국계 다국적 제약사가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보령을 저지하라”고 요구하며 질질 끌던 특허 분쟁을 승소로 이끌면서 널리 화제가 됐다.

 1990년 특허 분쟁을 일단락지으면서 캡토프릴은 세계를 향한 순항을 시작했다. 대만에 첫 수출돼 세계인의 고혈압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을 연 이후 이란·러시아·파키스탄·중국으로 수출선이 다변화하면서 ‘세계 속 보령그룹’의 미래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언론을 들끓게 한 특허 분쟁 뉴스가 그동안 그저 ‘자그마한 제약회사’쯤으로 인식되던 보령제약 이미지를 ‘세계 유수의 제약회사와 싸워 이긴 회사’로 뒤바꾸어 준 역설적 효과로 작용했다.

중국 카이쳉그룹에 겔포스를 수출하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있는 김승호 보령제약회장(오른쪽).



 보령제약은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들여 93년 경기도 반월공장의 캡토프릴 합성시설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이전보다 4배 이상의 캡토프릴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하고, 국내는 물론 세계 고혈압 치료제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굳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보령제약은 국내 제약업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국내 최초로 완제 의약품을 중국에 수출하는 데 성공한 것. 92년 보령제약은 중국 카이쳉그룹과 4년 동안 겔포스 수출계약을 체결했고, 마침내 74만5000포의 겔포스를 첫 선적했다. 중국 진출과 때를 같이 해 현지 10개 성을 순회하며 현지 의사와 약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겔포스 세미나를 하고 제품 효능과 사용 방법 등을 숙지하도록 했다.

 보령제약의 겔포스 수출은 완제 의약품으로는 국내 최초로 중국 시장을 개척한 의미 있는 일이었다.

80년대 말까지 한국 제약업계는 대부분 고액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외국 기업의 기술과 상품을 도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보령제약은 이미 70년대 말부터 세계 각국에 제품을 수출하면서 귀중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갔으며, 앰피실린과 겔포스로 수출 제품을 확대하면서 미주와 유럽, 동남아 각국으로 수출 시장을 다변화했다. 이런 가운데 80년대 말 냉전 종식과 동유럽 국가의 개방이 이어졌고,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한 수출 가능성이 활짝 열리게 됐다. 그중에서도 10억 인구의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수출 대상국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국내 최초의 완제 의약품 중국 수출이라는 결실을 맺기까지는,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과 경영 환경 변화에 대한 예측이 있었다. 특히 우루과이라운드를 비롯한 국제 협상을 통해 대외 무역의 전면 개방이 현실로 다가온 데다 95년 한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앞두고 전혀 새로운 무역 환경이 조성되던 시기인 만큼 이때 중국과 동유럽 진출은 그 의미가 더욱 컸다.

겔포스를 통한 보령제약의 중국 진출은 그동안 단순 원료의약품 수출에 의존해오던 국내 제약업계에 완제 의약품 수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우리는 그때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할 무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 시장의 문을 열었고, 지금 수억 명의 중국인들이 겔포스로 쓰린 속을 달래고 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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