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레임덕 방지의 비책? 박근혜와 관계설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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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대통령 당선인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당시 박 전 대표는 중국 특사로, 이재오 장관은 러시아 특사로 파견됐다.

월간중앙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나. 이 장관 준비 많이 하셨네.” 여권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이명박 대통령은 이재오 특임장관을 비롯해 여권 핵심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 장관이란 이 특임장관을 일컫는다.

박근혜 흔들기? 박근혜 안정화?
MB 레임덕 방지 방법론 놓고 개헌추진파, 청와대 참모진 엇박자
개헌론 지렛대 삼아 정국 변수 극대화하자 vs 협조를 전제로 국정운영 안착에 무게 두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이 회동에서 이 장관은 선진국의 분권형 개헌 사례를 들며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장관의 설명을 묵묵히 듣던 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개헌추진파들은 이 대통령이 관심과 공감을 그렇게 표명함으로써 다른 이들 앞에서 이 장관에게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고 해석한다. 한마디로 개헌 문제에선 이 대통령과 이 장관이 처음부터 이심전심, 같은 화법이었다는 말이다.

이 대통령의 이 발언을 두고서 청와대의 한 참모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이 대통령 말대로라면 이 대통령은 앞장서서 개헌을 지시하지 않은 게 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진작에 이 장관에게 개헌 추진 지시를 내렸다면 그 정황을 잘 알 텐데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나’는 식으로 반응할 리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이 장관이 먼저 단독 플레이로 개헌의 군불을 때니 이 대통령이 마지못해 추인해줬으리라 추정한다.

이처럼 여권 핵심은 이 대통령의 개헌 의지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한다. 그 견해 차는 생각보다 심각할 뿐만 아니라 개헌 추진파와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부 청와대 참모 사이에서는 상호불신마저 꿈틀댄다. 개헌론을 이끄는 친이계의 한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의 강한 개헌 의지를 일부 참모들이 깎아내려 한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이 장관만 이상한 사람이 됐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청와대 일부 참모들은 이 대통령이 개헌에 큰 뜻이 없는데도 이 장관이 엉뚱한 마음을 먹고 대통령의 뜻을 부풀려 왜곡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자기 뜻을 잘못 해석한다며 참모들을 몇 차례 질책한 것으로 안다.” 김해진 특임차관도 이 대통령의 확고한 개헌 의지가 있었기에 이재오 장관이 지난 5개월간 줄기차게 개헌론을 제기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개헌에 소극적인 이유
개헌 추진파들은 청와대 참모진의 보좌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통령의 뜻과 생각을 잘못 읽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에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친이계 모임인 ‘함께 내일로’ 개헌간담회에서 발제자로 나섰던 권택기 의원은 “청와대 참모들도 최근까지 이 대통령이 확고한 개헌 추진 의사를 가졌다는 걸 몰라서 미온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1월 23일 여당 지도부와 회동에서 개헌 의지를 밝히고, 2월 1일 신년방송좌담회에서 개헌 관련 인터뷰를 하고 나서야 청와대 비서진들의 입장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개헌에 적극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입장이 바뀌었다는 정도라고 하겠다.” 반대에서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물러섰을 뿐이라는 얘기다.

청와대의 일부 참모들은 여전히 이 특임장관이 개헌을 통해 이익을 보려 한다고 생각한다. 심하게 말하면 대통령의 의중을 빙자해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한다는 시각이다. 이들은 개헌론 자체를 그다지 탐탁하게 보지 않는다. 차기 총선과 대선을 염두에 둔 이 특임장관의 개인적인 욕심이 작용한 정치공학적 행보라 여긴다. 그러면서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의 명을 출납하는 비서들인데 비서들이 어떻게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고 말했다. 결국 대통령도 이 특임장관의 개헌론에 마지못해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청와대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은 일부 참모들이 개헌 문제에서 이 대통령의 의중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고 하자 “특임장관이 개헌을 위해 저렇게 애쓰는데 청와대 참모들은 그저 팔짱만 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적극 나서지 않는 태도는 대통령의 뜻을 충실히 받드는 결과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이 대통령이 개헌 반대론자들을 만나 설득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개헌을 직접 밀어붙이는 모양새가 되면 득보다는 실이 많기 때문이다. 참모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대통령의 오른팔이자 2인자로 불리는 이 특임장관이 이끄는 개헌추진론자들과 이 대통령 청와대 보좌진이 개헌 현안을 놓고 엇박자를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양쪽 다 이 대통령의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고, 완화하고, 관리하려는 욕구는 강하지만 방법론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설정이다.

“이 특임장관 쪽은 최대한 박 전 대표를 흔들어야 권력 누수가 지연된다는 생각이고, 청와대 참모들은 박 전 대표와 관계를 안정화해야 레임덕에 구애받지 않고 후반기 국정운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인 듯하다”고 대중심리와 행태를 연구하는 위즈덤센터의 황태순 수석연구원은 말했다. 위즈덤센터는 연세대 황상민 교수가 이끄는 연구소로 최근 정치권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해왔다.

이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레임덕, 즉 권력누수는 시간이 지나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레임덕을 막을 수는 없지만 관리하거나 늦추거나 완화할 수는 있다. 누수된 권력은 결국 차기 대선주자들에게 흘러간다. 유력 대선주자들이 이 대통령 통제권 밖으로 나가면 레임덕은 가속화된다. 역으로 대선주자들을 관리하면 레임덕은 늦춰진다. 대선주자 관리 방식을 놓고 특임장관 쪽과 청와대 참모 쪽이 서로 다르게 접근하는 셈이다.

이 특임장관의 개헌논리는 당위성을 기초로 한다. 유신헌법의 토대 위에 권력구조만 바꾼 1987년 헌법은 개정된 지 23년이 지났고, 한국 사회와 남북관계, 국제 정세의 변화에 조응하는 선진국형 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7대 국회에서 여야 정당이 개헌을 약속해놓고서 지금(18대 국회)에서 미룬다면 19대, 20대 국회에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마냥 겉돈다고 개헌론자들은 생각한다.

물론 야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내 친이계 국회의원들조차 명분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특임장관은 최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정치인은 역사에서 현실성이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의 방향에 옳은 일이면 추진해야 하며 그게 정치인의 덕목”이라며 계속 밀어붙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개헌 논의만으로도 레임덕 방지?
개헌론이 어떻게 이 대통령의 레임덕을 늦춰줄까? 개헌은 성사 여부를 떠나 논의 자체가 대선구도를 흔드는 폭발력을 지닌다. 한나라당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지면 친박계의 참여 여부부터가 논란거리가 된다.
2월 초 이틀에 걸친 한나라당 개헌의총에서 철저하게 개헌 논의 무시 전략을 구사했던 친박계가 당내 설치된 개헌특위마저 회피할 경우 개헌추진파의 거센 공격에 노출된다. 특임장관실의 한 관계자는 “2007년 4월 13일 한나라당은 차기 정부에서 개헌을 추진키로 당론을 확정했었다”면서 “친박계가 개헌특위 참여를 거부한다면 당론은 무시하고 정파적 이해관계를 먼저 따진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약속은 죽어도 지킨다는 박 전 대표의 평소 소신과도 어긋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특위가 일단 설치되면 개헌의 방향을 정하고 당 차원에서 추진하는 모양새가 될 개연성이 크다. 친이계 안에서도 개헌 자체에는 회의론이 만만치 않지만 개헌 논의 자체까지 막기는 힘들다고 개헌 추진파들은 생각한다.
지금 친이계가 두려워하는 건 당내 힘의 균형추가 박 전 대표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저항도 못 하고 맥없이 대세론에 휩쓸리는 경우다. 개헌을 둘러싸고 찬성-반대 대치전선이 그어지면 당내 친이 내지 중도파의 대거 월박(越朴·친박계로 흡수)은 일정 부분 저지된다고 생각한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개헌 카드로 하반기까지 박 전 대표를 흔들어 친박 쏠림 현상을 막으면 개헌추진론자들은 얼마든지 새로운 대선 후보를 물색, 옹립하는 시간을 벌고, 이게 바로 이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개헌의 실현 가능성보다 논의 자체만으로도 레임덕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친박계인 서병수 최고위원이 한나라당 개헌의총에 즈음해 “개헌이 야당과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해 실현 가능성이 없는데도 추진하는 데는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느냐”고 발언한 배경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개헌론은 실현 여부를 떠나 명맥만 이어가도 정계 개편의 불씨가 된다. 이재오 장관이 말하는 개헌은 분권형이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와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도 권력분산 쪽으로 개헌을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반면 개헌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박근혜 전 대표는 4년 중임제 개헌을 선호한다. 이렇게 되면 가장 강력한 주자인 박 전 대표를 상대하려고 분권형 개헌론자들이 반박(反朴·반 박근혜) 연합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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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직후인 2월 6일 친이계 모임 ‘함께 내일로’에 참석해 개헌 논의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이재오 장관.

정치연합에는 권력을 나눠 갖자는 분권형 개헌이 매력적이다. 뚜렷한 주자가 마땅치 않은 민주당 일부도 관심을 보일 법하다. 개헌추진파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시대조류를 외면하는 정치인으로 박 전 대표를 몰아붙이면서 한쪽으로는 자유선진당·민주당 일부와 보수연대를 형성하는 방안으로 정치권의 판이 다시 짜일 수도 있다. 최근 친이진영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김문수 경기지사는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선구도가 여권과 야당 단일후보로 구분되기보다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고, 우파 쪽에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도 포함된다”는 묘한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평소 개헌뿐만 아니라 선거제도와 행정구역 개편도 강조해왔다. 친박 쪽은 개헌도 개헌이지만 선거제도 개편 가능성에도 경계의 촉각을 곤두세운다. 만약 개헌 논의에 불이 붙으면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선거법 개정 문제도 도마에 오르게 된다.

현행 국회의원 소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의원 1명을 선출하는 선거제도)는 지역주의 온상으로 지적돼왔다. 개헌을 통해 시대정신을 구현하자는 마당에 지역주의를 고착화하는 선거제도를 그냥 둘 리 만무하다. 한 선거구에서 2명 내지 그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전환도 검토 대상이다. 정치권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된다면 내년 4월 총선은 파란에 휩싸인다고 본다. 극단적으로 말해 개헌에 동의하는 친이계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MB(이명박 대통령)당’을 만들어도 독자 생존할 수 있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중선거구제라면 MB당 나올 수도
한 정치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선거구제 전환 이후 크게 봐서 한나라당·친MB당·민주당 3파전으로 총선이 치러진다고 하자. 영남권에서는 한나라당과 친MB당이 1석씩 갈라 먹게 된다. 수도권 선거구에서도 친MB당은 2석 중 1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통령이 다른 지역보다 수도권 인기가 더 좋은 까닭이다. 영남권과 수도권에서 의석을 확보한다면 친이계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카드가 된다.”

중선거구제 전환은 지역주의 해소라는 명분에 뿌리를 두어서 친박계도 무턱대고 반대하기 어렵다. 또 부산·경남 등 영남권에서 민주당의 의석 확보를 가능케 해 전국 정당화 길도 터줄지 모른다. 더구나 여권의 분열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민주당은 대선전략 차원으로 검토해봄 직한 카드다.

개헌추진파들의 개헌론은 이처럼 여러 상황 변수가 연동되면서 차기 대선주자들을 일정한 관리 영역에 묶어두게 된다. 다시 말해 ‘박근혜 전 대표 흔들기’를 통해 레임덕을 관리하고, 지연시키는 효과를 낳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 노선을 중시하는 청와대 참모진 중에는 박 전 대표를 공연히 자극해서는 정국의 안정도 없고, 후반기 국정운영도 기약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박근혜 안정화’에 방점을 둔 모양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지난해 정기국회에서의 예산 강행처리의 예를 들었다. 친박 쪽에서 강한 제동을 걸었더라면 예산안 통과는 물 건너 갔으리라는 관측이다. 그는 “청와대 정무라인이 친박계 안정화를 꾀한 결과, 예산도 통과되고 정국이 그나마 무난하게 관리된다”고 했다. 2월 초 한나라당 개헌 의원총회만 해도 만약 친박계가 강하게 ‘아니오’라고 나왔다면 개헌론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게 청와대 일각의 판단이다. 기본적으로 유력한 대선주자인 박 전 대표와의 협력관계 속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게 실리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는 “집권 후반기는 초반기보다 훨씬 힘들게 돼 있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보다는 이미 나온 정책 중에서 결과를 빨리 도출하는 쪽으로 가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특임장관이 주도하는 개헌론에 청와대 참모들이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분석이다. 친이진영에서도 청와대 측의 입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꽤 된다. 친이계 전략을 연구해온 한 인사는 “레임덕의 올바른 관리는 현재권력과 미래권력 간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현재권력의 권능이 약해지고 미래권력의 힘이 커지는 게 바로 레임덕이다. 미래권력은 힘이 증가하지만 행사할 수 없고, 현재권력은 힘은 줄지만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집권 4년차의 현재권력은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고 마무리해야 하고 그 일에 미래권력이 동의한다면 국정은 안정적으로 운영된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새해 들어 “집권 4년차가 가장 ‘일’하기 좋고 결실을 볼 수 있는 해이며, ‘일’하는 사람에게 권력 누수가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특임장관이나 청와대 참모진이나 이 대통령의 레임덕을 방지하려고 동분서주한다. 양측은 대통령이 언급한 ‘일’의 의미를 각기 다른 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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