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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의 ‘판사 역할 변화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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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일견, 원고 승소로 판단됩니다만….”

  “일견이 뭡니까. 판사가….”

 이용훈 대법원장은 부장판사 시절 배석판사가 ‘일견(一見·언뜻 보기에)’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 어김없이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판사라면 모름지기 확고한 주관을 갖고 재판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한 중견 판사는 “대법원장이 판사직에 갖는 프라이드(자부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후에도 사법부의 우위를 역설해왔다.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며 “검찰 수사기록을 던져버리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제 그가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제시한 ‘판사의 역할 변화’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이 바라는 법관의 역할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국가기관이나 권력 등으로부터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는 수동적인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한 역할을 넘어 사법의 후견적·치유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담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법의 미래지향적 기능을 제대로 담당할 때….”

 대법원장의 발언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의 기대처럼 “법관이 국민의 든든한 사법적 후견인이 되어 국민의 아픔과 고통을 제대로 치료하고 실질적인 갱생을 도모하도록”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법원장 당부의 맥락을 좀 더 들여다보면 이제 막 법복을 입은 판사들에게 잘못 비쳐질 소지가 없지 않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하고, 소외당한 소수자의 기본권을 지키는 건 판사의 책무다. 하지만 이를 위해 판사들이 할 일은 법원에 접수된 사건들에 대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다. 판사는 어디까지나 기다리는 자요, 법률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다. 그렇다면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는 기본 역할을 넘어 맡아야 할 미래지향적 기능이란 과연 무엇인가. 후견적·치유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담당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편향 판결’ 논란이 스쳐간 지 1년이 지난 시점이다. 자칫 일선의 판사들에게 “판결로 세상을 바꾸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있다. 판사들이 ‘튀는’ 판결로 미래지향적 기능을 자임하고 나설 때 사회의 보호막인 법적 안정성은 흔들리게 된다. 법원 판결이 정치적으로 이뤄지는 ‘사법의 정치화’가 깊은 후유증을 남길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법원은 판결하는 곳이지, 봉사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격언이 있다. 법정이란 무대의 주인공은 판사가 아니라 법임을 가리킨다. 피고인의 사연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고 준엄하게 판결문을 읽어야 하는 게 판사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이번 발언은 앞으로 법원을 이끌 후배들에게 판사의 역사적 사명을 힘주어 말한 차원이라 믿고 싶다. 법정에 선 국민들은 판사가 10분, 20분 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길, 법원 창구에서 보다 친절한 민원 서비스가 제공되길 바라고 있다. 이러한 기본에 충실할 때 판사도, 법원도 국민 앞에 진정한 봉사자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