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명나라 마지막 황제 기일에 울던 악기, 추사와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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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정민·김동준 외 지음
태학사, 512쪽
3만2000원

“나는 명나라 유민이다. 3월19일이면 검(劍)을 어루만지며 슬피 울었다. 앞으론 이 금(琴)을 두드리며 울분을 터뜨려야겠다.”

 3월19일(음력)은 무슨 날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1611~44)가 자금성 뒤 언덕에 올라 스스로 목을 맨 날이다. 글을 쓴 ‘명나라 유민’은 누구인가. 조선의 사대부 윤행임(1762~1801)이다. 그는 병자호란 뒤 선양(瀋陽)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윤집(1606~37)의 후손이니 집안 할아버님을 죽인 원수 청나라를 증오하는 건 당연하나, 조선의 신하가 명나라의 유민을 자처한 건 좀 과했다. 더구나 숭정제는 이자성 농민 반란군의 자금성 쇄도에 압도돼 자결한 것이니 따지자면 ‘울분’의 과녁도 슬쩍 빗나간 셈이다.

 어쨌든. 숭정제의 기일에 슬피 우는 금(琴), 이 악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숭정제 재위 중 명 황궁에서 실제 연주됐던 현금(玄琴)이다. 박제가(1750~1805)가 1790년 청나라의 한족 명문가로부터 얻었고, 친구 윤행임에게 건네면서 ‘숭정금(崇禎琴)’이란 사연 많은 이름을 얻는다. 명 황제의 유품이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조선의 명문가에 150년 만에 들어온 것이다. 윤행임이 정조 사후 정국 격랑 속에서 사사되자 추사 김정희가 숭정금을 맡았고 추사는 훗날 이를 다시 윤행임의 아들 윤정현(1793~1874)에게 돌려준다. 이 때 추사가 함께 건넨 ‘숭정금실(崇禎琴室)’이란 편액이 또 대단한 작품이다. 하지만 ‘숭정금’의 행방은 고종 시대까지 살았던 윤정현 이후 묘연해졌다.

 자살한 명 최후의 황제가 뜯던 현금(玄琴)이 그 명을 친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파 박제가의 손에 들어오고, 명나라의 유민을 자처하는 조선 선비의 사랑을 받다가 추사를 거쳐 조선의 황혼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는 이야기. 숭정금을 소장한 인물들이 국경과 시대를 달리하며 품었을 대조적인 회한들이 그 자체로 완벽한 소설적 구성을 이룬다.

 이 책은 숭정금의 사연처럼 흥미진진한 한국학 이야기 27편을 엮었다. 계간지『문헌과 해석』50호 발간을 기념한 기획이다. 인문학이 무궁무진한 콘텐트의 원천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그야말로 번뜩이는 책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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