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부 신뢰 높여야 금융시장 안정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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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원도 6개 주요 도시에 영업점이 있는 도민저축은행이 22일 자진 휴업을 선언했다. 금융회사가 스스로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이 결정은 예금인출 사태를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회사가 문을 닫으려면 먼저 당국에 영업정지를 요청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자진 휴업은 어떤 규정에도 없다. 그런데도 사전에 당국과 전혀 상의 없이 나자빠진 것이다. 이 회사의 대주주와 경영진의 직업정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금융당국은 “금융회사가 정해진 시간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펄펄 뛰었지만 이날 밤 사후적으로 영업정지를 인정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은행 경영진이 금융당국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반발을 당국이 자초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도민저축은행이 지난해 6월 공시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4.16%다. 하지만 이 은행은 그 직후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21억원 확충했다. 이를 감안하면 BIS 비율은 5.5%로 당국의 기준선(5%)을 넘는다. 그럼에도 금융위원회는 17일 이 은행을 BIS 비율 5% 미만인 블랙리스트 10곳에 포함시켰다. 이후 예금인출(뱅크런)이 이어지자 자진휴업을 결정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금융위원회의 블랙리스트 선정에 문제가 있었던 데다 김석동 위원장의 입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17일 오전 부산·대전저축은행 2곳에 영업정지 조치를 취할 때 그는 “BIS 비율이 5% 이상인 94개 저축은행의 경우 과도한 인출이 일어나지 않는 한 추가 영업정지 조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서가 있었지만 시민들에겐 더 이상의 영업정지는 없는 것으로 들렸다.

 이틀 뒤 블랙리스트 10곳에 포함됐던 부산저축은행 계열사와 보해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했다. 예금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추가 정지가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이다. 보해저축은행은 이달 초 32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한 데 이어 25일 150억원, 3월 중 740억원을 추가 증자해 BIS 비율을 5%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돼 있었다. 부산의 우리저축은행도 당국에 애꿎게 당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부실화된 이 은행을 1998년 현재의 대주주가 인수할 때 정부가 부실액을 직접 메워주지 않음으로써 BIS 비율이 5%를 밑돌게 됐다. 그런데도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블랙리스트에 넣음으로써 고객들이 몰려들어 예금을 빼갔다. 이 회사는 지난해 106억원의 흑자를 낼 정도로 장사를 잘했기에 더욱 억울해 하고 있다.

 정부는 22일 추가 대책을 내놨다. 영업정지 저축은행 예금자들이 예금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는 한도를 80%에서 90%로 높인 것이다. 예금을 당장 꺼내 쓸 수 없는 불편을 덜어주겠다는 것이다. 대책도 필요하지만 이런 예민한 상황에선 무엇보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 모호한 말은 이번처럼 신뢰를 그르치고, 신뢰를 잃으면 어떤 대책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