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5) 스탈린 생일잔치 기분 상한 마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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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2월 29일 밤, 스탈린 생일 기념공연을 관람하는 마오쩌둥과 스탈린. 이날 마오는 표정을 통해 불만을 드러냈다.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의 1차 소련 방문은 국제사회에 수많은 억측거리를 제공했다.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는 사람이 2개월 이상 머물며 행적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대단해 보이는 일일수록 진상을 알면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허다하다. 베일투성이였던 마오의 소련 방문도 희극적인 요소가 강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소련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오가 ‘소련 일변도’를 천명했을 때 지식인과 민주인사,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 거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색 제국주의와 홍색 제국주의, 색깔만 틀릴 뿐 미국과 소련은 다를 게 없었다. 중국을 놓고 뭔가 도모하느라 눈을 반짝거리는 것은 똑같았다. 일본이 지배했던 동북쪽에서는 “코 작은 놈들 떠난 자리에 코 큰 것들이 들어왔다”며 공개적인 비난이 비일비재했다.

스탈린도 인정했듯이 1945년 8월 14일 중국국민정부와 소련이 맺은 ‘중·소 우호동맹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폐기시키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족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느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2월 18일 인민일보에 마오의 이틀 전 모스크바 도착 모습이 크게 실렸다. 중국인들은 울화통이 터졌다. 모였다 하면 스탈린 비난에 열을 올렸다. 공·상계와 지식인 사회가 특히 심했다. “스탈린은 예절을 모르는 사람이다. 직접 영접하지 못하면 말렌코픈지 뭔지 하는 후계자라도 내보내는 게 정상이다.”

수행원 중에 당이나 국무원의 고위직이 없다 보니 “주석이 소환당한 게 틀림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신문국(신문출판총서의 전신)의 성명도 묘했다. “소련 측은 관례대로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스탈린이 일본 외무상을 직접 영접한 적이 있다.”

마오쩌둥은 도착 당일 오후 6시 크렘믈린 궁에서 스탈린과 마주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얻어맞고 따돌림당했던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곳이 없었다”고 운을 떼자 스탈린이 화답했다. “중국 혁명은 승리했다. 승리자는 견책 대상이 아니다. 먼 길을 왔으니 빈손으로 갈 수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마오의 입에서 “보기에 좋고, 맛도 좋은 것”이란 말이 나왔다. 전형적인 중국식 표현이었다. 스탈린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통역이 진땀을 흘리며 “새로운 조약의 체결과 조약문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부연했다.

스탈린은 ‘얄타 협정’을 거론하며 난색을 표했다. 국민정부와 체결한 조약을 당분간 유지할 태세였다. 어조가 강경했다. 마오가 조약 얘기를 꺼내면 중간에 말을 끊고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몇 달 전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오면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분명히 말한 적이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마오는 기분이 확 상했다. 정작 만나면 딴소리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심부름하는 사람들만 데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21일,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스탈린의 70세 생일잔치가 열렸다.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계속됐다. 스탈린과 나란히 앉은 마오는 시종 굳은 얼굴로 박수만 쳤다. 참석자들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연호해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온 마오는 “음식은 맛있어야 하고, 공연은 재미있어야 한다. 박수 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며 짜증을 부렸다. 이날 6시간을 붙어 있었지만, 스탈린은 조약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제는 마오가 솜씨를 보일 차례였다. “문을 닫아걸라”고 지시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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