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④ 약국거리의 효시 종로5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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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서울 종로5가 124번지에 자리 잡은 보령약국과 초창기 약국거리 모습.


서울 종로5가를 걷다가 여고생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긴 왜 이렇게 약국들이 많지?” “글쎄 조선시대부터 한약방들이 있었던 거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종로5가에 ‘약국거리’가 생긴 사연은 지금부터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숭문고를 졸업한 게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봄이었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지내던 열아홉 살의 나에게 전쟁은 모든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뜻밖의 충격이었다.

거리에는 시체가 나뒹굴었고 가는 곳마다 부상자들의 고통스러운 아우성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군에 자원입대했고 1957년 중위로 예편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와서는 약국을 개업하기로 했다. 어릴 때 형이 고향인 충남 보령에서 열었던 ‘대창약방’과 사촌형이 서울에서 운영했던 ‘홍성약국’ 영향이 컸다. 나는 매일 서울 곳곳을 걸어 다니며 적당한 점포를 알아봤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5가의 낡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건너편에 국내 최대 동대문시장이 있었고, 5가 네거리 북쪽으로 서울 북부로 연결되는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자연히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데다 특히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인 만큼 입지로는 적격이라는 판단이었다. 간판에는 한성문방구라고 쓰여 있었지만 웬일인지 영업은 하지 않고 있었다. 주인에게 알아본 결과 장사가 안돼 두 달 전부터 아예 문을 닫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작 임차를 하려고 하자 실제 상점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이 다섯 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 점포를 두고 주인은 까다롭게 굴었다. 주인은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높은 임대료를 요구했지만 나는 끈질기게 주인을 설득하고 사정을 한 끝에 그 점포를 적당한 가격에 임차할 수 있었다. 종로5가 124번지였다.

곧바로 개업 준비에 몰두한 끝에 1957년 10월 1일, 마침내 약국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약국 이름은 고향 이름을 따서 ‘보령약국’으로 정했다.

지금 보령제약그룹은 국내 최초로 고혈압 신약 개발에 성공하고 수출 계약까지 하는 등 연매출 1조원을 바라보고 있지만, 54년 전 그 뿌리는 다섯 평짜리 보령약국이었다.

 보령약국이 자리 잡은 지역 인근 동대문시장터는 조선시대 때부터 ‘배우개장(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이곳을 구한말에 확장한 것이 동대문시장이다. 초기에는 농산물 거래가 주종을 이뤘다. 이후 포목·양장·양품으로 품목을 확대해 왔는데, 특히 종로5가 쪽은 일찍이 한약재 도매시장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한약을 취급하는 점포와 건재상은 주로 종로5가 네거리 동쪽 가로변에 밀집돼 있었고, 가로변 북쪽 골목에는 이들 한약상을 고객으로 삼는 한약 제분업소가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약업과 연관이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종로5가는 전후 월남한 피란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하루종일 상인과 고객이 북적대는 활기찬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종로5가에 약국을 차린 내 전략은 지역적인 측면에서 성공이었다. 개업 직후부터 보령약국은 인근 동대문시장의 활발한 장터 모습을 방불케 했다. 약국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매일 넘쳐나는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종로5가를 지나는 사람 다섯 중 하나는 보령약국 손님’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종로5가에 약국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 이후에는 전국에서 도소매상이 모여드는 ‘약국거리’가 형성됐다.

보령약국 영업이 워낙 잘되니까 서울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대형 약국들이 앞다퉈 종로5가로 옮겨 온 것이다. 종로5가 약국거리의 원조이자 발상지가 바로 보령약국인 셈이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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