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평론] 영혼의 실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스페이드spade, 하트heart, 다이아몬드diamond, 클럽club. 서양 카드의 네 가지 무늬다. 같은 무늬의 패라면 숫자가 높을수록 우위에 있다. 그렇다면 숫자는 같은데 무늬가 다를 경우 어떻게 우열을 가릴까?

지역마다 조금씩 룰이 다르지만 스페이드가 으뜸무늬인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같은 에이스라도 유독 스페이드만 카드 한 장이 꽉 차게 새겨지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스페이드는 무덤을 팔 때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삽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재미로 즐기는 카드에도 죽음을 상징하는 스페이드가 사랑의 하트, 부귀영화의 다이아몬드, 행복의 클럽을 제치고 인간의 본질중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역사 이래 죽음만큼 불가사의한 주제도 드물다. 파라오의 피라미드와 진시황의 불로초처럼 현세의 최강자들은 한결같이 불사의 꿈을 불태웠지만 아무도 실현하지 못했다. 불사는 커녕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시원한 해답을 얻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 계로季路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선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유교에 사생관이 없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역시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한 그를 의아해하는 제자 크레도에게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나는 커다란 신비의 문 앞에서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심정이다."라며 죽음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석가와 예수는 논외로 한다. 그들이 설파한 죽음은 종교적 진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 숱한 철학자들이 저마다 죽음에 대해 날카로운 편린을 보여주긴 했지만 지나치게 사변적이어서 죽음의 실체를 밝혀내기엔 역부족이란 느낌이다. 죽음을 잠깐 경험했다는 임사臨死 체험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 역시 생생해 보이지만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비주의적 색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1997년 복제양 돌리로 생명복제의 시대를 열었으며 2003년 인체게놈사업Human Genome Project의 완성으로 조물주가 창조한 인체 설계도마저 낱낱이 밝혀낼 세기말 과학은 죽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죽음은 과학에게도 규명이 어려운 존재다. 맹독성 극약인 청산가리의 패러독스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혀끝에서 맛을 느끼자마자 사망하기 때문에 아무도 청산가리의 맛을 말할 수 없듯 죽은 자가 실제 죽음을 체험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죽음 역시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물리학 법칙을 따른다고 가정하면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1953년 유전물질인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해 생물학사상 가장 큰 업적을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최종적인 분석결과 존재하는 것은 오직 원자들뿐이다. 유일한 과학은 물리학뿐이며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른 학문은 모두 사회사업의 하나로 전락할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남겼다.

죽음을 포함한 모든 자연현상은 궁극적으로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기본입자인 원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오늘날 과학은 죽음을 엔트로피 최대를 지향하는 우주공간에서 엔트로피 최소로 진화하는 생물이 치르는 불가피한 대가로 해석한다. 생물은 생식reproduction과 대사metabolism란 두 가지 관점에서 무생물과 구분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지닌다. 현미경으로 겨우 보이는 짚신벌레 한 마리가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정교하다.

그러나 인간은 짚신벌레와 같은 세포가 10조 개 이상 모여 이뤄진 다세포생물이다. 여기에 다른 생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최고 성능의 뇌를 소유하고 있다. 파동함수를 창시해 노벨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인간처럼 정교한 개체가 우주공간에 잠시라도 제 모습을 갖춘 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물리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며 생명의 신비에 대해 경이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현존하는 엔트로피 최소 개체인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기도 하다.

반면 짚신벌레는 영양 공급이 중단되거나 방사선을 쪼이는 등 외부조건이 악화되지 않고선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 이분법二分法으로 생식하는 짚신벌레나 세균, 발아發芽로 생식하는 효모 등 단세포 생물은 특유의 단순성 때문에 불사不死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무나 동물처럼 일반적인 다세포생물도 죽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만이 유일하게 영혼, 즉 자유의지를 지녔다는 점에서 동물의 죽음과 구별된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생명나무 대신 자유의지를 위해 선악과를 선택한 아담의 원죄가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죽은 뒤 육체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선 과학적 분석이 이미 끝난 상태다. 체온은 식고 중력으로 혈액이 몰려 아래쪽 피부엔 시반屍班이 형성되고 팔과 다리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사후강직死後强直이 일어나며 내장과 근육 등 유기물은 세균에 의해 분해되고 무기물인 뼈만 남게 될 것이다. 시신의 부패는 철저하게 물질계의 법칙을 따라 진행되며 누구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궁금한 것은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존재의 거취다. 물질처럼 소멸될 것인가, 아니면 자아를 인식하는 영혼은 그대로 존속할까. 현대과학은 인간의 영혼이나 자유의지 역시 물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된다는 유물론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주고 있다.

인간의 정신에 대해 가장 손쉽게 가정할 수 있는 유물론적 해석은 청년시절 러셀이 품었던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와 일치한다. 우주탄생 당시 빅뱅big bang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입자들이 우주공간을 운동하면서 태양계를 비롯한 숱하게 많은 항성과 행성을 만들어냈다. 지구처럼 생명이 탄생할 조건을 갖춘 행성 위에 미생물에서 인간까지 생명체가 진화되기 시작했다.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르면 입자의 질량과 속도를 알 경우 특정시간 후 좌표를 예상할 수 있으므로 우주공간 내 모든 물질은 빅뱅 당시 운명이 미리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방아쇠를 쥔 손가락을 당겨 1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세르비아 청년의 자유의지도 태초에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죽음은 존재의 또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죽음과 함께 우리는 우주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론적 사고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量子力學의 탄생으로 비판을 받았다. 전자電子처럼 관측자인 인간의 관찰 자체가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미립자의 경우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존재 여부를 확률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현대물리학에선 전자의 위치를 점으로 찍어 표현하지 않고 원자핵을 둘러싼 구름 모양의 확률분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립자가 모여 이룬 거시의 세계에선 경우가 다르다. 가령 달걀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보자. 땅에 떨어진 달걀은 거의 예외 없이 깨진다. A는 B가 아닐 확률이 수십 억분의 1에 불과하다면 현실적으로 A는 B라고 단정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다. 이는 진리를 확률로 이야기하는 양자역학의 시대에도 특정환경에서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는 자유의지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획일화된 패턴을 보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유전자가 완전히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를 태어난 직후부터 서로 완벽하게 똑같은 환경에서 양육한다고 가정해보자.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면 이들은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일치할 수 있을 것이란 섬뜩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은 환경만 계속 일치한다면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며 똑같은 선택을 내릴 것이란 의미다. 이는 흔히 말하는 복제인간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복제인간이란 단순히 일란성 쌍둥이처럼 육체적 유전자형이 일치할 뿐 정신적으론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공간에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동일한 개체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니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제 일란성 쌍둥이는 양육환경이 서로 달라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행동양식을 보인다. 미국에선 태어나자마자 따로 입양되어 자랐던 쌍둥이가 39년 만에 재회했을 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음에도 둘 다 린다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다 이혼했으며 제임스 앨런이란 아들이 있었고 베티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취미도 글자 새기기와 목공일로 동일했으며 즐겨찾는 휴양지도 플로리다 세인트피터스버그 해변으로 일치했다고 한다.5)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생물이 무생물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response이다. 가장 간단한 형태가 빛을 비추면 피하는 플라나리아의 행동과 같은 주성走性이다. 고등생물로 갈수록 물건이 갑자기 다가오면 눈을 감는 반사, 또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본능이 그런 것처럼 발달된 반응양식을 보인다. 주성과 반사까지는 뇌가 필요 없지만 본능부터는 뇌가 관여한다.

이러한 반응은 모두 유전자를 통해 대물림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알기 쉽다. 처음엔 지구상에 벌거벗은 여인을 보았을 때 성욕을 느끼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가 있었다. 그런데 성욕을 느끼는 개체가 종족번식에 유리했으므로 이들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개체는 도태됐다. 살아남은 자의 성욕을 담당하는 유전자는 계속 후손에게 전달된다.

본능보다 뛰어난 반응양식이 바로 학습學習이다. 학습은 유전되진 않지만 기억과 언어를 통해 후손에게 훨씬 정교하고 복잡한 생존방식을 가르칠 수 있다. 즉 시각과 청각 등 감각신경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모든 정보는 뇌에 축적되고 뇌 가운데 최고위중추인 대뇌피질은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최선의 모범답안을 도출해내며 이 모범답안은 후손에게 학습을 통해 전수된다.

오늘날 인간이 자랑하는 고귀한 영혼도 결국 외부자극에 대한 생물의 반응이 진화과정을 통해 고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결과에 다름아니라는 해석이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유물론적 관점으로 뇌를 바라볼수록 자신은 조종사가 아니라 승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유의지란 허울좋은 단어에 불과하며 단지 개체의 안녕과 종족의 보존이란 대명제만 있을 뿐 이를 벗어난 선택이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단지 정소와 난소 속에 숨어 있는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고도의 수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인간의 본질은 영육을 지닌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며 개체는 '엔트로피 최대'란 열역학 법칙에 따라 소멸하지만 유전자는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계속 전승되는 불사의 삶을 누리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에서 '달걀이 먼저'란 결론이 자연스레 내려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 불쾌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줄 안다. 물론 아직도 인간의 영혼이 뇌에서 비롯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들도 많다. 뇌의 생물학적 역할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뇌를 움직이는 영혼은 따로 있다고 보는 데카르트식 이원론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이제까지 과학이 접해본 가장 난해한 대상일 뿐더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윤리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까닭에 연구가 어렵다는 원초적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 첨단과학기술의 발달은 비록 느린 속도지만 확연하게 정신의 실체가 물질에 있음을 증명해나가고 있다. 유전자 이식과 파괴를 통한 성격과 지능의 관찰과 조작, 양전자방출 단층촬영장치PET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unctional MRI를 통한 마음의 해석이 초보적이지만 이미 가능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심정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갈구한다. 비단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영혼만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표현되는 이 땅 위에서의 삶이 얼마나 모순되고 비참한 일인가.

영혼이 없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논리와 증거에 입각한 과학적 진실은 인간의 소망과 이익을 초월한다. 설령 오늘 인류가 모두 멸망할지라도 지구가 자전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이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숨져가는 것도 모른 채 집에서 TV코미디를 보면서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과학은 죽음 이후 영혼의 존재를 부인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그것은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우주를 관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진화론을 거슬러올라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타깃은 뇌다. 진화론의 진수는 단연 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뇌로 인해 사유를 얻게 됐다. 그러나 뇌는 오직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강요한다. 필연적으로 편견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인간의 눈은 적외선이나 자외선 대신 가시광선만 볼 수 있으며 귀는 주파수 16~24,000Hz 사이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7)

인간이 고귀하게 믿는 가치와 사상도 따지고 보면 종의 번식과 생존을 위해 교묘하게 포장된 술책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모성애를 극찬하지만 다른 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만을 위한 지독한 이기주의일 수밖에 없다.

뇌는 남과 나를 구분하는 생물학적 개체성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체성이 커질수록 반대급부로 죽음에 대한 자각도 높아진다. 세상에서 누린 것이 많을수록 물질계로 환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뇌는 유전자의 영속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허무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칭송했다. 광대무변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서 잠시나마 사유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난 것은 확실히 축복이다. 그러나 생존과 안녕을 위해 겹겹이 포장된 의식의 가면을 벗고 우주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 워야 하지 않겠는가.

홍혜걸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

이머지 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999.11.1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