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링스헬기 뜨면 해적들 우릴 총알받이로 내세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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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국 해군의 링스헬기만 뜨면 우리는 총알받이로 끌려나갔습니다.”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다가 구출된 삼호주얼리호 갑판장 김두찬(61·사진)씨는 납치 당시의 긴박함을 이렇게 전했다. 김씨를 4일 오후 부산시 북구 구포동 자신의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말을 할 때마다 부러진 앞니를 드러냈다. 해적 팔꿈치에 입을 맞아 앞니 한 개가 부러지고 윗니 서너 개가 흔들린다고 했다. 그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납치상황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스리랑카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6개월 계약기간이 끝나 싱가포르에 도착하면 한국으로 귀국할 참이어서 마음이 푸근했다. 15일 오전 7시48분 갑판에서 미얀마 선원들에게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재경보벨이 울렸다. 이상해서 아래쪽을 쳐다보니 흑인 1명이 보였다. 해적이었다. 도어문을 모두 잠그고 배 바닥 쪽 대피실로 피했다. 대피하면서 강도·해적 상황을 알리는 SSAS통신망으로 비상사태를 알렸다. 해적들이 총을 쏘면서 쇠망치로 문을 부수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 들려왔다.”

-대피실로 해적이 어떻게 들어왔나.
“선실을 하나씩 부수며 확인하던 해적 4명이 대피실 위 로프 묶음 아래 숨겨진 입구를 발견하고 뛰어 내려왔다. 선원들은 모두 손을 머리에 얹고 선교로 끌려 나와야 했다.”

해적들은 이때부터 식량을 아끼느라 선원들에게 하루 한 끼만 먹였다. 해적들은 총과 20㎝ 길이 회칼을 들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 해적은 여자친구와 전화하면서 시시덕거렸는데 “큰돈 되는 한국 선원을 많이 잡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해적의 태도가 급변한 것은 18일 오후 2시쯤 있은 1차 구출작전이 실패한 뒤였다. 그후 해적들은 선원들을 수시로 폭행했다. 해적들은 툭하면 “You kill”이라면서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석해균 선장이 해군의 구출작전을 어떻게 도왔나.
“석 선장이 깨어나면 ‘목숨이 몇 개냐’고 물어보고 싶다. 선장이 선박용어집에 ‘엔진오일에 물을 섞어라’ ‘자동조타장치를 고장 내라’ 등 지시를 적어주면 책을 내가 들고 다니며 선원들에게 보여줬다. 모두 선장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따랐다. 손재호 1등기관사는 구출작전이 시작되자 해군이 쉽게 배에 오르게 기관실로 뛰어내려가 엔진을 정지시켰다. 선원들은 모두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구출작전 때 해적들과 쉽게 구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해군이 작전을 위해 30여 분간 사격을 할 때 어떻게 선원이 한 명도 다치지 않았나.
“사격이 시작되면서 선원들은 선교(Bridge) 좌우에 5명씩 총알받이로 끌려나갔다. 해군 총알은 엎드린 위로 날았다. 선원들을 피해 사격하는 것 같았다. 사격이 계속되면서 유리창이 깨지고 선교가 벌집이 되자 해적들은 선실로 피신했다. 해적이 내려간 뒤 선교 뒤쪽 해도실 탁자 아래에 피해 있는데 ‘대한민국 해군입니다. 배는 우리가 장악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해군 특수전부대(UDT/SEAL)원들을 보니 눈물이 왈칵 나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한없이 고마웠다.”

-석 선장을 해적이 쐈나.
“석 선장과 나는 해도실 탁자 아래쪽에 매트리스를 둘러 쓰고 숨어 있었다. 그곳은 해군의 총알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 해적 아라이가 ‘캡틴’ 하며 내 머리를 잡아챘다. 순간 비상등 아래서 그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 내가 석 선장이 아니여서 아라이는 계속 ‘캡틴’하며 석 선장을 찾는 듯하더니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

-작전을 시작할 거라는 걸 알았나.
“해군이 근거리초단파 무선통신(VHF)으로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보고 작전이 임박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돈 번다고 여기까지 왔지만 해군은 우리를 구하려 목숨을 걸었구나 생각하니 한없이 고마웠다.”

그는 “이 나이에 육지서 빈둥거리면 뭐 하노. 선원 구하기도 힘든 판에 내가 일하면 수출입에 도움을 주는데… 다시 바다로 가겠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뒤 군 복무를 마치고 1973년부터 선원생활을 시작했으니 올해가 38년째다. 어선 2척을 갖고 있던 부친의 사업을 돕다가 바다가 평생 일터가 됐다고 한다. 그토록 고생을 하고도 다시 배를 타려는 그는 영원한 뱃사람이었다.

부산=김상진 기자 daed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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