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발음·억양보다 중요한 건 문법, 키신저 영어가 모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04호 12면

조화유씨는 문화체육관광부에 공용 영문 감수팀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격을 떨어뜨리는 엉터리 영어를 꼭 추방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조화유 제공]

재미 영어 전문가 조화유(68)씨는 영어에 ‘도통’한 사람이다. 1972년 토플(TOEFL)의 두 개 부문(어휘·영작문)에서 세계 최고 점수를 기록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90년대 그가 쓴 10권짜리 영어 학습 시리즈 『이것이 미국영어다』(원제『미국생활영어』)는 국내에서 100만 부 이상 팔렸고 지금도 스테디셀러다. 이 시리즈는 미주 동포사회의 영어교재 시장도 평정했다. 일본·중국·대만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놀라운 건 그가 국내에서 혼자 영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른바 ‘토종 영어’다. 그가 중·고교·대학을 다닌 55~65년엔 마땅한 영어교재가 없었다. TV 영화도 한국말로 더빙된 것뿐이었다. 영어학습을 위한 테이프는 물론 CD·DVD는 생기기도 전이었고 극장에나 가야 영화에서 원어를 접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중앙SUNDAY의 ‘조화유 잉글리시’ 코너에 매주 시사성 있고 위트가 넘치는 생활영어를 기고하고 있다. 조씨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일간지 기자로 근무하던 70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소설 『흉일』이 당선돼 등단했다. 그의 소설 주제는 주로 6·25전쟁과 민족문제, 남북통일이다. 2010년엔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했던 남남북녀(南男北女)의 애절한 사연을 그린 중편소설 『전쟁과 사랑』을 발표했다.

‘영어 달인’ 조화유, 영어의 왕도를 말하다

조씨는 7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38년째 미국에서 살고 있다. 수도 워싱턴DC와 인접한 버지니아주의 작은 전원도시에서 부인과 단 둘이 조용히 살고 있다. 최근 두 차례에 걸쳐 그를 e-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영어교재 만들기와 소설 쓰기에 천착을 거듭해 온 이유와 영어 잘하는 비법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선생님께서 영어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부산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재미에 빠졌죠. 미국 공보원(현재는 미국문화원)에 자주 가서 좋아하는 영어 원서를 빌려다 읽었습니다. 주로 위인들의 전기(傳記), 세계사, 미국 역사에 관한 책이었죠. 대학(서울대 사회학과) 가서는 대학 영자신문 기자로 활약했습니다. 65년 졸업과 동시에 조선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했어요. 만 6년을 다니고 동양통신 국제부 기자로 스카우트됐는데 거긴 영어로 기사를 쓰는 곳이었죠.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73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어요. 주립대학인 서부 미시간대 역사학과 학과장이던 한국계 미국 사학자 앤드루 남(한국명 남창우) 교수와의 인연으로 그 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가 ‘한·미 관계사’를 전공했죠. 6·25전쟁 전후사가 중심이었어요. 2년 뒤부터 미국 내 한국 신문들에 생활영어 원고를 게재하기 시작했고 36년째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72년 토플에서 세계 최고 점수를 받으셨는데 당시 엄청난 화제가 됐을 것 같은데요.
“토플 총점이 최고였던 건 아닙니다. 토플시험은 6개 부문이 있었어요. 그중 어휘(vocabulary)와 영작문(writing ability) 2개 부문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거죠. 당시 5년 누적 세계 토플 응시자 수는 11만4000여 명이었는데 어휘 최고 점수는 69점, 영작문 최고 점수는 67점이었어요. 그런데 나의 72년 어휘는74점으로 5년 기록을 깼어요. 영작문은 67점으로 동점이었고요. 듣기(listening) 점수는 좋지 않았어요. 당시엔 문법과 어휘 위주로 공부했지 영어 듣기를 따로 공부할 환경이 아니었거든요.”

-외국인과 만나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 영어를 잘하게 된 비결이 있나요.
“영어 원서를 읽을 때 반드시 사전과 노트를 옆에 놓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고 노트에 적었죠. 그렇게 독학하다 보니 독해력, 단어실력, 작문능력이 나도 모르게 늘었어요.”

-평소 ‘영어회화의 기본은 문법’이라면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영어를 모범사례로 자주 언급하셨는데….
“영어 발음이 서툴고, 악센트를 엉뚱한 음절에 두더라도 문법에 맞게만 말하면 미국인들은 대개 알아들어요. 독일 태생인 키신저 전 장관의 발음은 전형적인 원어민 발음은 아니지만 문법이 정확해요. 누구나 그의 말을 알아들으니 영어 잘하는 거죠. 그게 정답이죠.”

-본지에 연재 중인 ‘조화유 잉글리시’는 짧은 분량이지만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보여 줍니다. 뛰어난 시사상식과 적절한 비유, 시의성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시사문제에 정통한 비결이 있습니까.
“내 전공이 사회학과 역사학이었고 젊은 시절 신문기자를 해 봤잖아요. 세상 돌아가는 일에 항상 관심이 많아요. 이 나이에도 영어 공부를 계속합니다. 특히 미국에서 사니깐 매일 미국 신문·잡지·TV를 보며 끊임없이 아이템을 찾아요. 한국 신문과 TV도 매일 인터넷을 통해 접합니다. 독자를 끌려면 글이 재미있어야 해요. 새로운 문장, 색다른 표현이 나오면 항상 따로 메모해둬요. 살아있는 영어를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에서 영어 학원 차리거나 영어 관련 비즈니스를 하면 경제적으로 더 윤택할 텐데요.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아요. 집에서 글 쓰는 일 이외에 다른 비즈니스하는 것은 없습니다. 학원에 나가 강의하거나 학원을 경영한 적도 없습니다. 매일 신문에 영어칼럼 쓰고, 가끔 소설 쓰고, 블로그에 글 올리고 해마다 해외여행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에 만족합니다. 악착같이 돈 더 벌겠다고 짧은 인생 허둥대며 살고 싶지 않아요.”

-등단 이후 발표한 작품은 어떤 게 있나요.
“중편소설 하나를 포함해 15편입니다. 98년 첫 작품집 『이것이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이었다』를 냈고 지난여름 『전쟁과 사랑』이란 타이틀로 두 번째 작품집을 냈습니다. 최신작은 『죄와 벌』인데, 사형폐지 반대론을 단편 소설로 엮은 겁니다. 나는 꼭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내용을 씁니다.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단편소설 『다대포에서 생긴 일』입니다. MBC가 2시간짜리 드라마를 만들어 방영했는데 원작과 너무 다르게 만들었더군요. 원작이 훨씬 낫다고 자부합니다(웃음). 요즘은 이 소설을 영어로 옮기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능숙하지 못한 우리 2남1녀와 재미동포 자녀들을 위해서요.”

-소설 주제가 대부분 6·25전쟁과 남북문제입니다. 거기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고향이 경남 거창의 시골마을입니다. 어려서 서울로 이사와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어요. 전쟁은 참혹했죠. 아픈 가족사도 있습니다. 큰형님은 당시 신생 대한민국의 공군 조종사였어요. 그런데 작은형이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끌려갔어요. 형제가 남과 북으로 갈려 싸우는 꼴이 된 거죠. 다행히 작은형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북으로 패주하던 인민군 틈에 끼어 있다가 도망쳐 살았죠. 다섯 살 난 남동생은 공중 폭격이 심한 날 경기가 들어 숨졌어요. 동생이 쓰던 밥그릇에 동생이 좋아하던 강냉이 튀긴 걸 담아 묻을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또 젊은 세대가 우리 근현대사를 너무 몰라요.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요. 철학자 조지 샌타얘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해야 하는 저주를 받는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6·25전쟁을 잘 모르면 또 그런 전쟁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전쟁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살아온 이유입니다.”

-선생님께선 오래전부터 한국 관광지 안내판의 영문이 잘못된 게 많다고 지적해 오셨죠. 요즘 개선이 많이 됐다고 보시나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지난해 통영과 부산 해운대 지역을 여행하는데 관광 안내문의 영어 표현이 형편 없더라고요. 2010~2012년을 ‘한국관광의 해’로 정해 놓은 게 무색할 정도예요. 정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최근 펴낸 『영문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도 조잡한 영어로 쓰이긴 마찬가지예요. 이미 배포한 건 수거하고 더 배포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 엉터리 공용 영문을 없애려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영문감수팀을 조직해야 한다고 신문 기고를 통해 지적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입니다. 영어 원어민을 몇 명만 채용하면 될 텐데 말이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