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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해 보이는 여권의 개헌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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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1990년 10월 민자당 대표이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고향 마산으로 내려갔다. 그해 1월 민주정의당(노태우)과 통일민주당(YS), 민주공화당(김종필·JP)이 3당 합당의 조건으로 밀약(密約)한 내각제 각서가 공개된 때문이다. 권력을 위해 야합한 증거가 드러난 데다 대통령의 꿈마저 접어야 할 위기를 정면돌파한 것이다. 결국 그는 내각제 밀약을 무산시키고 대통령이 됐다.

 각서 파동이 일어난 것은 서명한 세 사람의 생각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뒷날 드러났지만 노 전 대통령은 엄청난 축재(蓄財)를 했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로를 자신은 피하고 싶었다. 내각제라는 수단으로 권력을 놓지 않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소수파인 JP는 권력을 쥘 수 있는 방법이 내각제밖에 없었다. 그러나 YS는 권력을 나누기보다 독식할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애초부터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던 셈이다. 거대 여당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내각제가 정치적 연대의 접착제가 된 것은 이때만이 아니다. 97년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어낸 김대중(DJ)-김종필의 DJP연합도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한 것이다. JP는 또 다른 파트너를 통해 내각제를 실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개헌이 정계개편과 맞물린 것은 권력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권력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권력을 모두 잡을 수도 있고, 현실정치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다른 정파를 유인하는 미끼일 수도 있고, 담합하는 수단도 된다.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일으키는 힘은 거기서 나온다. 정치권에서 보면 그 이상 큰 폭발력을 가진 이슈가 없다.

이런 폭발성 강한 이슈를 최근 집권층이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한나라당에 개헌 드라이브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달 8~10일 사흘간은 개헌 의총을 열기로 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 무모해 보인다. 개헌이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주변 사람들도 이런 처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알면서 뭘 묻느냐”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개헌 추동력이 없다는 것은 안다”고 고백한다. 개헌이 이뤄지려면 우선 정치권이 합의해야 한다. 국회 재적(在籍)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 당장 당내에서 박근혜 전 대표 측은 자신들을 흔드는 공작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차기 주자 중 한 명인 김문수 경기지사도 반대한다. 손학규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에서도 냉소적이다.

 가장 중요한 여론도 관심이 없다. 동서리서치의 조사를 보면 현 정권 내에 개헌하자는 의견은 34.8%에 불과하다. 다음 정권이나 그 이후에 하자는 의견이 53%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조사에서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개헌에 대한 의욕이다. 왜 개헌을 하느냐 하는 공감대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분권형 권력구조를 전도하고 다닌다. 그러나 동서리서치 조사에서 분권형 선호는 8.3%다. 내각제도 7%다. 이걸 모두 합쳐도 15.3%에 불과하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하지만 국회에 대한 불신이 더 크기 때문이다. 대화와 타협은 없고, 폭력만 난무하는 국회에 권력을 넘기는 게 못 미더운 것이다.

이 대통령은 “중임제든 분권형이든 내각제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국회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이겠지만 그럴수록 왜 개헌을 해야 하는지는 더 모호해진다. 대법원과 헌재의 통합 문제는 법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고 기본권 조항, 환경 조항을 고치기 위해 개헌하자고 하면 여론 지지도가 더 낮아질 게 뻔하다. 그러니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게 된다.

 이 대통령이 임기 초 개헌을 추진했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국회 미래헌법연구회에는 국회 의석의 과반수가 넘는 167명의 의원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현 정권 내 개헌에 회의적으로 돌아섰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개헌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뭘까. 1년 전만 해도 민주당에서도 개헌 논의가 여야를 뛰어넘어 찬반 양 진영으로 정치권을 재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의원이 있었다. 자신도 그런 구도에서는 이 대통령 진영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친박(親朴·친박근혜) 대 반박(反朴)의 구도다.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것도 이런 움직임이다. 그러나 야권에서도 후보군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결국 개헌론은 정치권 전체가 아니라 한나라당만 두 진영으로 갈라서게 만들 공산이 크다. 자칫 집권 후반기 혼란을 더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김진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