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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 최초의 여배우 단체 ‘부인 연구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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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엄명선 일행 여배우의 공연에 대한 ‘매일신보’(1912. 9. 22.) 기사. “조선의 처음으로 흥행하는 엄명선 일행의 여배우는(…) 사동 연흥사에서 십일 동안을 계약하여 명일부터 흥행한다더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한국 연극 최초의 여배우 단체 ‘부인 연구단’

한국 최초의 여성 연극배우는 누구일까. 한국 근대연극의 시초인 신파극이 공연되던 초기에는 ‘온나가타(女方)’, ‘여형배우(女形俳優)’라고 하는 여성 인물을 연기하는 남자 배우들이 있었다. 초기 신파극에서 여성 역할을 남자배우가 맡았던 것은, 여배우 지망생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의 고전극인 ‘가부키’의 여형배우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일본 신파극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한국 신극사상 최초의 여배우로는 1917년 신파극과 창극의 결합을 시도했던 극단 ‘개량단(改良團)’ 소속의 여배우 김소진(金少珍)이 꼽혀왔다. 김소진은 원래 기생 출신으로 창(唱)을 잘해 여배우로 뽑혔고, 창극 계통에서도 촉망받았다고 한다. 그녀 이후 마호정·이월화·복혜숙 등 여배우들이 연이어 등장함으로써 여배우 층이 두터워졌다는 것이 이 시기 여성 배우들에 대한 그동안 학계의 주된 의견이었다(김소진·마호정·이월화 중에서 누가 최초의 여배우인가에는 논란이 있다).

 그런데 당시 ‘매일신보’의 연예계 기사를 보면, 여배우의 등장은 1917년이 아니라 1912년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부 상마동 어느 집에서는 여배우 엄명선(嚴明善)씨가 백수풍신(白首風神)으로, 날마다 여배우 십사 명을 데리고 신파연극을 사습한다는데 기술이 차차 한숙(嫺熟)하여가므로, 불원간 개연(開演)할 예정이라더라”는 기사가 1912년 9월 6일자 연예면에 실려 있다. 그 이후에도 ‘엄명선 일행’의 동정에 대한 기사가 종종 보이다 드디어 1912년 9월 23일에 연흥사에서 이들의 첫 공연이 시작됐던 듯하다.

 이렇게 처음으로 등장한 여배우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을까. 사흘 뒤 신문에서는 이들을 ‘부인연구단’이라고 부르며 “‘삼인 결혼’이라는 연제(演題)로 흥행하였는데, 배우들 제각기 맡은 바 과목에 썩 능란하달 수는 없으나 첫날 흥행하는 것으로는 매우 잘하므로 관람자가 모두 박수갈채할 뿐 아니라 장내에 만원이 되었으므로, 해사문 밖에 모여 서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여러 백 명에 달하였다”(‘연예계’, ‘매일신보’, 1912.9.25)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여성 배우들로 구성된 ‘부인연구단’이 실제 존재했으며 정식으로 공연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들 엄명선이나 ‘부인연구단’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의아한 노릇이다. 김소진처럼 남성 중심의 극단 내에 편입되어 있던 여성 배우가 아니면 ‘진짜’ 배우라고 인정해 줄 수 없었던, 당대 문화계 혹은 오늘날 학계의 편견 탓일까?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