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기 200대 사겠다” … 후진타오의 ‘여객기 구매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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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인근의 아이젠하워 빌딩에서 미·중 양국의 재계 인사들과 만났다. 왼쪽부터 러우지웨이 중국투자유한책임공사 회장, 후 주석, 오바마 대통령, 미 항공회사 보잉의 짐 맥너니 회장. 백악관은 앞서 중국이 보잉 여객기 200대 구매를 포함한 450억 달러 규모의 미 수출품 수입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중·미 정상회담에서도 중국의 ‘여객기 구매 외교’는 빛났다. 중국이 이번 정상회담에 맞춰 200기(약 190억 달러)에 이르는 보잉 여객기 구매계약을 체결한 것은 위안화·보호무역 등에 대한 미국 측 압력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다. 보잉사 측은 “약 1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게 됐다”며 반색이다. 일자리 창출에 골몰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 대통령이 흐뭇해할 통 큰 선물이다.

 중국의 ‘여객기 구매 외교’는 1997년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주석의 미국 방문 때 시작됐다. 당시 장 주석은 30억 달러 규모의 보잉 여객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그 뒤 여객기 구매는 중국의 대(對)서방 외교에서 빠지지 않는 ‘전가의 보도’였다. 미국과 정상회담을 열면 보잉 여객기를,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면 에어버스 여객기를 사주는 식이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주석은 지난해 11월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에어버스 여객기 102대를 구매했다.

 중국의 여객기 구매 외교가 가능한 것은 막대한 국내 시장 덕분이다. 보잉이 최근 발표한 세계 여객기 수요 보고에 따르면 중국은 2029년까지 약 4330기의 항공기(약 4800억 달러)를 구매해야 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 해 평균 약 227대꼴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 수 년 동안 매년 150~200기의 여객기를 구입해 왔다.

 세계 민간여객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과 유럽의 에어버스가 양분하는 구도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중국 시장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업계 1, 2위가 바뀐다. 중국은 두 경쟁자 사이에서 ‘꽃놀이패’를 즐기고 있다.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에어버스기를, 유럽 측과 마찰을 빚으면 보잉기를 더 사준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은 중국에 팔 물건이 많지 않다. 경쟁력이 있는 첨단 제품 중 상당 부분은 전략물자로 지정돼 중국에 수출할 수 없다. 여객기 수출에 더 매달리는 이유다. 중국은 어차피 수입해야 할 물량임에도 생색을 내면서 선심 쓰듯 구매 계약을 체결한다.

 세계 항공업계는 “서방 항공사가 그나마 중국에 여객기를 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중국이 자체 개발하고 있는 민간 여객기 C919의 상용화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우리 기술’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이 여객기는 2014년 시험비행을 거쳐 2016년 투입될 예정이다.

◆후진타오는 전용기 아닌 민항기 이용=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전용기를 두고 있지 않다. 이번 방미 때 타고 간 비행기도 전용기가 아닌 민항기다. 중국은 장쩌민 주석 때인 2000년 주석 전용기 도입을 목적으로 보잉 767-300ER을 구매했다. 하지만 이듬해 9월 비행기를 인도받아 시험비행하던 중에 이상한 전파가 탐지됐고, 조사 결과 화장실·침실 등 기내 곳곳에서 도청장치 27개가 발견됐다. 중국은 전용기 도입 계획을 즉시 취소했고, 그 뒤 후 주석의 해외 방문 때마다 민항기를 전세 내 이용해왔다.

한우덕·이에스더 기자

◆C919=항공기 제작업체인 중국상용항공기(中國商用飛機)가 2008년부터 개발하고 있는 항공기. ‘C’는 중국을, ‘9’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으로, ‘19’는 190개 좌석을 상징한다. 세계 항공업계를 ABC(에어버스·보잉·C919) 구도로 재편하기 위해 ‘C’를 붙였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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