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피고인 망 조봉암, 유죄 파기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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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조봉암 선생(왼쪽)이 1958년 10월 2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한 모습. 이날 그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중앙포토]

1959년 7월 30일 서울 서소문 대법원 법정.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竹山) 조봉암이 청구한 재심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당시 그는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피고인의 재심 청구를 기각한다.” 18시간 후 사형이 집행됐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조봉암이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그로부터 52년의 세월이 흐른 2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대법관들이 이용훈 대법원장 좌우에 앉았다. 이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망(亡) 조봉암. 유죄 부분을 파기한다…이제 뒤늦게나마 잘못을 바로잡고….”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조봉암 선생에게 적용됐던 간첩죄와 국가변란죄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이 대법원장은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고 볼 수 없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유일한 직접증거인 증인 양모씨의 진술은 육군 특무부대가 일반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고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권총과 실탄을 소지한 혐의는 선고유예 판결했다. 선고 후 재판 과정에 참여한 대법원 관계자와의 일문일답.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 개표 장면. 조봉암(曺奉岩·아래)과 이승만(李承晩)의 이름이 적힌 바구니가 보인다. [정부 기록사진집]

 -이번 판결의 의미는.

 “조봉암 사건은 ‘사법살인 1호’란 지적을 받고 있지만 크게 보면 냉전 시대의 희생자였다. 이번 판결로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 등 당시 진보세력에 대해 역사적 재평가가 본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건국세력이었던 조 선생을 재조명하는 데 걸림돌이 됐던 간첩 혐의에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해 12월엔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위헌 판결을 했는데.

 “긴급조치 판결이 ‘박정희 시대’의 과오에 대한 것이라면 이번 조봉암 사건은 ‘이승만 시대’의 대표적인 과오를 바로잡는 의미가 있다.”

 -반세기 만의 판결인데, 판결문에 사과나 반성의 문구가 없다.

 “법률판단기관이 법률적 잘못을 바로잡는 것 이상의 사과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조봉암 사건은=조 선생은 56년 11월 진보당 창당 후 민의원 선거를 준비 중이던 58년 1월 육군 특무부대에 구속됐다. 당시 그는 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맞서 216만 표를 얻으며 대중적인 지지를 넓혀가던 중이었다. 특무부대는 첩보부대 공작요원인 양씨에게서 ‘북한의 지령과 함께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뒤 조 선생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했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2, 3심에선 각각 사형이 선고됐다. 이에 따라 제헌 국회의원·초대 농림부 장관 등 건국의 주역이었던 그에게 ‘간첩’이란 딱지가 붙게 됐다. 광복 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그는 46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 뒤 탈당해 공산주의와 결별했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위협적인 정적(政敵)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했다.

권석천·최선욱 기자

◆재심=판결 확정 후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에 중대한 오류가 있을 때 당사자 등의 청구에 따라 그 판결의 옳고 그름을 다시 판단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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