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7)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2

왜 모를 것인가. 그녀들이 때 묻지 않은 선근(善根)을 지녔다는 말에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그녀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특히 여린은 더욱 그랬다. 세상에 의해 훼손되거나 변하지 않을 만큼 그 선근이 깊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계를 받든 안 받든 상관없이 상주불멸로 그 자리에 박혀 있을 선근이었다. 주지스님으로부터 내려 받은 법명은 애기보살이 관음, 여린은 세지(勢至)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법명이었다. 주지스님이 내렸다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이사장 머리로부터 나왔을 터였다. 관음보살의 현현인 관음이 이미 여기 있고, 이제 여린이 세지로서 짝을 맞췄으니, 말 그대로 명안진사엔 ‘관세음보살’이 함께 좌정하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보면 관음봉과 세지봉이 만나 절묘하게 합을 이룬 셈이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정말 나쁜 일도 생기는 것일까.
애기보살과 세지보살이 계를 받던 날 사라진 노과장은 다음 날, 또 다음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백주사와 김실장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노과장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종일 분주해 보였다. 명안전을 바쁘게 오가는 걸 보면 이사장에게서도 불호령이 떨어진 눈치였다. 백주사와 김실장은 발정난 전갈처럼 독이 올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노과장을 본 게 언제인가?”
백주사가 눈빛을 번뜩이며 내게 물었다.
“점심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갈 때 보곤 못 봤는데요.”
“무슨 말은 없었고?”
“할 일이 있다면서 가급적 빨리 먹고 나오라는 말은 했었는데요, 그뿐입니다. 제가 다시 경비실로 왔을 땐 노과장님, 보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 중에 본 사람은 없고?”
인부들이 다 모여들자 백주사가 재차 다그쳤다.
“제가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나선 사람은 허드렛일을 주로 맡아 하는 황씨였다. 내게는 정말 좋은 출연자였다. 황씨는 그날 설사를 했던가 보았다. 식당에서 밥을 기다리고 있다가 애기보살이 들어오기 직전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노과장이 경비실을 나와 일주문 밖으로 걸어가더라고 했다. 식당과 경비실은 백여 미터나 되는 거리였다. 황씨는 그러나 머리에 쓴 모자 때문에 뒷모습만 보고도 노과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노과장은 그날 흰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과장이 왜 걸어서 일주문 밖으로 나갔다는 거야?”
“그러게요. 하지만 분명히 노과장님이었고요, 빠른 걸음이었어요.”

노과장은 과연 무엇 때문에 경비실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일주문 밖으로 나간 것일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그 점은 궁금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세지보살이 된 여린을 차에 싣고 들어오며 노과장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황씨가 목격한 것은 식사 직전이었고, 프로그래머가 들어온 것은 식사가 끝난 후였다. 노과장은 프로그래머가 여린을 데리고 올 시간을 알고 있었을 테니 미리 큰 문을 열어두었던 것 같았다. 그랬다면 추우니까 경비실에 그냥 머물러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프로그래머는 경비실 안의 노과장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프로그래머와 여린의 모습을 발견한 내가 연못을 돌아서 문화궁으로 접근할 때 노과장이 경비실에 있다가 뛰쳐나와 나를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황씨가 목격한 것은 우연일 뿐 아니라 순간적인 일에 불과했다. 황씨는 일주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노과장을 본 게 맞을 테지만, 노과장은 황씨가 식당 안으로 들어온 직후 경비실로 금방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문 밖에서 나는 무슨 소리를 들었거나, 숲에서든 풀에서든, 어떤 이상한 정경을 보고 확인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가 곧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나의 진술은 황씨가 노과장을 보기 전에서 멈춰 있었다. 황씨의 목격담이 당연지사 노과장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노과장의 마지막 모습은 그래서 ‘일주문 밖으로 황급히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로 요약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