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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계속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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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성우 서혜정(49)씨가 무대에 나와 마이크 앞에 섰다. “이렇게 예쁜 목소리로 말하니까 제가 누군지 잘 모르시겠죠?”라고 하더니 곧 딱딱한 중저음 목소리로 “남자, 여자 몰라요”라고 발음했다. 청중석에서 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케이블방송 인기 프로그램인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내레이터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서씨를 뒤늦게 알아본 것이다. 그녀는 “나는 지금 기독교 신자지만 어릴 때는 천주교였다”며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서씨의 시 낭송이 이어졌다. ‘이태석 신부님, 별이 되신 당신께’였다. ‘…당신의 그 깊은 사랑이 우리의 무뎌진 마음을 온통 적시고 있습니다. 당신은 죽어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와 별이 돼 주신 이태석 신부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가톨릭 신부를 추모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모습, 보기 좋았다.

 오늘은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가 선종한 지 1년 되는 날이다. 그는 지난해 1월 14일 새벽 5시35분에 암으로 영면했다. 1주기를 앞둔 지난 토요일(8일), 경기도 과천시민회관에서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음악회 명칭은 ‘슈쿠란 바바’. 이 신부가 생전에 헌신했던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마을 부족(딩카족) 언어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회관에 1500여 명이나 몰렸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통로 계단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야 했다. 장익 주교, 이해인 수녀, 이만의 환경부 장관, 조해진 국회의원 등도 눈에 띄었다.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이재현) 주최로 후원사업을 겸해 2년마다 열리는 음악회는 이번이 4회째. 행사의 주역이던 이 신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추모음악회로 바뀌었다.

 서혜정씨의 시 낭송이 끝나자 검은 피부에 키가 훤칠한(딩카족은 세계적으로 키가 큰 부족으로 2m 넘는 사람도 흔하다) 청년 세 명이 무대에 나섰다. 수단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토마스 타반(26), 존 마옌(24), 산티노 뎅(26). 고 이태석 신부의 제자들이다. 토마스와 존은 재작년 12월에 와서 현재 충북 괴산의 중원대학교 의료공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다. 산티노는 작년 크리스마스 날 입국했으니 한국 생활이 채 한 달도 안 된다. 농업을 전공할 생각으로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수단어린이장학회, 인제의대 등에서 이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아프리카 청년들의 한국어 노래 합창에 관중도 입을 맞추었다. 한국어에 익숙한 존과 토마스는 안경과 모자, 흰 장갑 차림에 율동까지 섞어 ‘뽕짝’ 실력을 과시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나훈아 ‘잡초’).

 수십 년 내전에 시달려 그야말로 나훈아 노래처럼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수단 청년들의 한국 유학은 작은 ‘기적’이다. 이 신부의 선종 이후 수단어린이장학회 회원은 1만4000명으로 늘었다.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이도 1500 명에서 4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것도 기적이다. 사실 장학회의 이재현 이사장은 고시 출신 환경부 공무원이다. 그가 10년 전 케냐에서의 유엔환경계획(UNEP) 파견근무 시절 이태석 신부를 만나 감동받고 장학회 결성에 나선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지만, 이태석 신부를 보면서 혹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꼭 바다가 열리고 땅이 일어서야 기적인가. 병자가 벌떡 일어나야 기적인가. 잔잔한 감동들이 모여 또 다른 감동을 낳고, 이윽고 큰 물결이 된다면 그게 기적 아닐까. 이태석 신부는 1년 전 오늘 숨지기 직전 유언하듯 “나는 평화로우니까 걱정 말라” “Everything is good(모든 게 좋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몸 바쳐 뿌린 씨앗이 크고 작은 기적으로 이어질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