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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식 물가 잡기 … 업체에 10명 들이닥쳐 임원 메모도 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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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한 식품업체의 A과장은 요즘 통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담합 여부를 조사하겠다며 신년 벽두부터 사무실로 들이닥친 공정거래위원회 직원들 때문이다. 공정위 직원 10여 명은 사무실에서 컴퓨터 파일은 물론 개인수첩 메모까지 하루 종일 뒤지고 있다. 공정위 직원들이 있는 동안에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어렵다. 그와 동료들은 회사 휴게실 등에 삼삼오오 모여 “오늘은 어느 사무실로 공정위 사람들이 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과가 됐다. A과장은 “공정위 직원들이 오늘은 3층, 내일은 5층 하는 식으로 회사 곳곳을 휘젓고 다닌다”며 “회사 핵심 임원들은 메모 한 장 한 장까지 다 뒤진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식품회사의 B임원은 최근 경기도 과천의 농림수산식품부에 다녀왔다. 농식품부에서 주요 식품업체 관계자들을 ‘호출’했기 때문이다. B임원은 “말이 면담이지 사실은 제품 값을 낮추라고 요구하는 자리였다”며 “업체로선 참 부담스럽다”고 전했다.

  정부가 물가와의 전면전을 선언하고 나서면서, 공정위를 비롯해 농식품부와 지식경제부 등 모든 정부 부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기업들은 전전긍긍이다. 급기야 CJ제일제당과 풀무원이 두부 가격을 내렸다. 배 이상 값이 오른 대두 때문에 일부 품목 가격을 20% 정도 올린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다시 가격을 낮춘 것이다. 동서식품도 지난해 10월 캔커피 가격을 올렸으나 이번에 다시 내렸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 급등 때문에 원가 압박이 큰데 정부까지 식품업체를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몰아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계속될 것 같아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물가를 잡자고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완력으로 기업의 팔목을 비틀어 가격을 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풍선처럼 이렇게 눌러놓은 가격은 언젠가 다시 튀어오르기 마련이다. 그동안 기업은 기업대로 멍이 들고, 얼마 안 가 소비자도 가격 급등에 신음하게 된다.

 한 식품업체 임원은 “물가를 낮추자는 정부의 취지에는 십분 공감하지만, 지금처럼 정상적인 기업 활동조차 어렵게 만드는 것은 곤란하다”며 “뾰족한 대응수단이 없으니 그냥 멍 하니 바라만 볼 뿐”이라고 말했다. 물가 잡다가 기업 잡게 생겼다.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