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4)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9

나는 연못가 빈 정자에 간신히 기대섰다.
플루트 소리가 멈춰져 있었다. 나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그녀가 걸어간 방향을 간신히 바라보았다. 식당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식당을 나온 애기보살과 이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무실을 나선 백주사가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백주사를 제외하곤 모두 햇빛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애기보살이 뭐라고 했는지, 이모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나는 행여 누가 볼세라 얼른 돌아서서 얼어붙은 연못을 보았다. 연못의 희끄무레한 표면이 눈물 때문에 화이트 아웃(White out) 상태가 되었다.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가령 이런 일도 있었다. 엊그제 저녁이었다. 설법을 위해 이사장이 단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이사장의 목소리를 창 너머로 듣고 있었다. “아난다야, 네가 이제 이 강당에서 무엇을 먼저 보느냐?” 아난다는 부처님의 제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사장은 부처님이고 단식자들은 아난다였다. 이사장이 단식자, 혹은 아난다가 되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여기에서 먼저 여래를 보옵고, 다음에 대중을 보오며, 창 너머로는 숲과 동산을 보옵니다.”

이사장은 걸출한 목소리 연기자였다. 아난다 목소리를 내면 아난다가 되고 부처의 목소릴 내면 부처가 되었다. 이사장이 부처가 되어 또 물었다. “아난다야, 네가 숲과 동산을 어떻게 해서 보았느냐?” 아난다는 당연히 창이 열려 있어 숲과 동산을 본다고 말했다. “아난다야!” 부처는 말했다. “몸이 강당 안에 있으나 문이 열렸으매 숲과 동산을 보거니와, 하물며 이 중생 중에, 강당 안에 있으면서, 강당 안의 여래를 보지 못하고 강당 밖을 보는 자가 있겠느냐?”
무슨 소리인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다.

피식 하고 조소가 나온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조소가 나온 것과 거의 동시에 역시 갑자기, 근원 모를 눈물이, 그때 솟아나왔다. 부처가 된 이사장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아난다야, 네 마음은 신령한 것이어서 온갖 것을 분명히 보는데, 그 마음이 실로 몸 안에 있다면, 먼저 몸 안엣것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설사 심장, 간, 밥통까진 보지 못할지라도 손톱과 머리카락이 자라고 힘줄이 움직이고 맥박이 뛰는 것은 최소한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안에 있는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밖을 아느냐?”

나도 모르게 어둔 창 밑에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았다.
눈물 때문이 아니라 슬픔 때문이었다.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슬픔은 분명히 내 안에서 번져 나와 나를 무릎 꿇렸다. 슬픔은, 나의 부처였다.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부처가 된 슬픔이, 이사장이, 가만히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기분이었다. 아난다가 부처의 법문을 듣고 ‘이제 제 마음이 몸 밖에 있었음’을 깨달았다면서 말했다. “중생들이 몸 안의 것을 보지 못하고 몸 밖의 것만 보는 것은 마치 방 밖에 있는 등불이 방 안을 비추지 못함과 같나이다.”

나는 여전히 아난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부처가 다시 물었다. “그 깨닫고, 알고, 보고 하는 마음이 만일 네 몸 밖에 있다면,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여서 서로 관계가 없을 것이니,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이 깨닫지 못하고 몸은 알아도 마음은 모르게 될 것”이라면서, “아난다야, 네가 눈으로 볼 때, 마음이 분별하지 않느냐?” 했다. 아난다는 그렇다면서, 그러나 “마치 유리그릇을 두 눈에 댄다면, 비록 유리그릇으로 가려졌지만, 보는 데 지장이 없으니 눈이 보는 대로 분별한다.”고 말했고, 부처는 이에 “안난다야, 그렇다면 네 눈은 알더라도 몸은 깨닫지 못할 것”이라 하시면서, “네가 지닌 오장육부를 보는 것이 꼭 안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라고 일렀다.

눈물은 그 대목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뜨겁게 울었다. 내가 알아들은 것은 몸과 마음으로 갈라진 의식을 합쳐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사장의 마지막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말귀를 알아들은 그 대목에선 오히려 슬픔이 가셨다. 나의 슬픔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었다. 이를테면 허공과 같았다. 샹그리라로 돌아와 창 너머로 운악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더니, 유리창을 보는 건지 운악산을 보는 건지, 또 이유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나는 가책도 없었고 노함도 없었고 미움도 없었다. 사랑과 욕망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남아 있는 감정은 단 하나, 이유 없는 덩어리, 슬픔뿐이라는 걸 나는 그날 밤 깨달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