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허남진 칼럼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반대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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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허남진
정치분야 대기자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반대했어야 했는데….” ‘정동기 파동’이 확산되자 청와대 비서관들 사이에선 뒤늦은 자탄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이미 버스는 지나갔고, 한나라당까지 대통령에게 정면 반기를 드는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고 말았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처음엔 정 후보자의 적격성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전관 예우는 물론 수석비서관 출신이면 감사원장의 독립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이 거론됐단다. 그러나 정 후보자에 대한 이명박(MB) 대통령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더 이상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 참모 중 한 명이라도 “안 됩니다”라고 강력하게 직언(直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탄탄한 보좌 시스템이요, 그런 탄탄한 보좌로 보완되고 걸러져야 대통령의 의사결정이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참모들은 대통령의 의사결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정동기 파동’은 바로 이 대목, 대통령의 의사결정 과정에 나타난 피로현상이란 점에서 특히 우려스러운 것이다.

 일견 참모들의 잘못이 크다.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게 그 첫 번째다. 정 후보자는 대검차장 때 MB의 대선 최대 걸림돌이었던 BBK스캔들을 “수사 결과 사실이 아니다”라고 명쾌하게 해결해줬던 장본인이다. 민정수석 땐 이른바 민간인 사찰 논란의 최정점에 있었다. 청문회가 열리면 묻혔던 BBK사건이나 민간인 사찰 문제가 다시 ‘의혹’으로 포장돼 재등장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정무적 판단에 따른다면 당연히 말렸어야 했다. 그걸 흘려버렸다. 그런 정황을 알고도 직언을 하지 않았다면 용기 부족이요, 직무유기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청와대 내부 분위기다. 참모들이 대통령을 향해 기탄없이 ‘No’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문제란 말이다. 어떤 연유든 그 책임은 분위기를 그렇게 가져간 대통령에게 귀착될 수밖에 없다. MB는 대소사를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인 데다 자기 의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를 내거나 질책이 잦은 것은 아니지만 입맛 맞추기가 까다롭고 그래서 보고하기가 두렵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편이고 사안별로 견해도 뚜렷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시는’ 입장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비서실 출신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번 파동도 대통령의 정 후보자에 대한 두터운 신임에서 비롯됐다. 참모들은 대통령이 새 사람을 쓰기 꺼려하고 신세 진 사람에겐 꼭 보은(報恩)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한 대통령의 의중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걸 대놓고 반대할 참모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한비자(韓非子)는 일찍이 “군주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군주가 바라는 바를 드러내면 ‘신하는 (그에 맞춰) 잘 보이려고 꾸미게 된다(臣自將雕琢)’는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의 쿠바 미사일 사태라는 국가 비상시기 때 공격 수위를 결정하는 백악관 최고전략회의에 의도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국가의 주요 결정에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이나 편견이 끼어들면 자칫 올바른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당시 상황은 미·소 핵충돌과 3차대전까지 거론될 정도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초긴장 상태였다. 대통령이 없는 회의에서 군사·외교·전략의 최고 전문가들은 자유로이 격론을 벌였고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사태는 소련이 백기를 들고 후퇴함으로써 미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시 전략회의를 주재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법무장관은 대통령의 회의 불참이 편견 없이 최선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고 술회했다. 대통령은 회의의 결론에 따라 결단을 내리고, 국민과 국회를 향해 설명함으로써 국론을 한군데로 결집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대통령 리더십의 훌륭한 본보기다. 우리 대통령에게도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그나저나 한나라당의 반란으로 MB는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대통령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던 ‘돌격대’ 역할을 한나라당이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도 국회를 거치지 않으면 햇볕을 볼 수 없다. 국회에 손발이 묶이면 일을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국회에서 내 식구부터 등을 돌렸으니 MB로선 참으로 난감하게 됐다. 해법은 하나다.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부터 탄탄한 시스템으로 재정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싫고 자신이 없더라도 대화정치에 복귀해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의 핵심 주체임을 잊어선 안 된다.

허남진 정치분야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