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9) 버크의 설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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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6월 미 7함대 소속 5순양함대의 로스앤젤레스 함상에서 한국군과 미군 지휘관들이 모여 작전을 관찰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백선엽 당시 1군단장, 그 옆의 담배 파이프를 문 사람이 5순양함대를 이끌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이다. 버크 제독은 당시 국군 1군단에 아낌없는 함포 지원사격을 펼쳤다. [백선엽 장군 제공]


알레이 버크 제독은 내 회고록에 이미 여러 차례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여느 미국의 해군 고위 장교답게 매우 절도가 있고, 스스로 기품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1군단장 시절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개전 초반에 나는 미군을 만나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타입이었다.

‘캐딜락 함포’로 날 도왔던 버크 #한밤에 불쑥 호텔을 찾아왔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보니 새벽 4시 #그는 충고인듯 경고인듯 내뱉었다

 우리에게는 없었던 5만분의 1 지도, 적의 진지를 일거에 무력화시키는 155㎜ 야포, 성능이 좋았던 전차 등 우리가 적을 맞아 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염치를 따지지 않고 그를 미군에 요구했다. 나의 그 뻔뻔스러움은 속초 1군단을 지휘하면서 당시 동해에 떠있던 미 7함대 5순양함대 버크 제독을 만났을 때도 어김없이 작동했다.

 내가 이끌던 1군단은 당시 야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산악이 매우 발달한 강원도 지역에서는 적들과 진지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적 진지를 사전에 먼저 포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야포를 갖추지 못해 적의 고지를 빼앗으려면 상당한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알레이 버크(1901 ~ 96)

 나는 버크 제독과 친분을 맺은 뒤에는 무조건 5순양함대의 함포사격을 요청했다. 버크 제독은 그런 내 요구를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함포 포탄은 일반 야포의 포탄에 비해 훨씬 고가(高價)였다. 전함(戰艦)급의 함포 한 발은 당시 약 1만 달러로 그때의 고급 승용차 캐딜락 한 대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그래서 전함의 미 수병들은 함포를 쏘면서 “캐딜락 한 대 날아간다”고 외치곤 했다.

 나는 그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버크 제독에게 꾸준히 함포 사격 지원을 요청했고, 버크는 그런 내 요구를 한마디 불평도 없이 들어주곤 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1군단으로 찾아와 나와 함께 야간에 일선 진지를 직접 순회하는 ‘모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1군단의 전선 방어와 공격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지원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진지함을 보였다.

 그는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서 나에 대해 “전투에서 탄약 소모량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불평하면서도 “그러나 여건이 닿는 한 백선엽의 1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적었다. 그는 평범한 미 해군 지휘관은 아니었다. 개별적인 병력 지휘에도 탁월한 면모를 지녔지만 미 해군 전체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데도 능숙한 전략가였다.

 그는 미국 해군 역사상 큰 스캔들이었던 ‘제독의 반란(Admiral revolt)’ 해프닝의 주역이었다. 역시 앞에서도 소개한 내용이지만, 1949년 당시 루이스 존슨 미 국방장관이 “B-36 폭격기만 있으면 항공모함이 필요없다”는 발언을 하자 버크가 앞장서서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그런 이채로운 경력으로 한때 좌천됐다가 한국전선에 참여했고, 내가 53년 미국을 방문할 때에는 미 해군의 전략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나는 1군단장 시절 그의 로스앤젤레스 함정으로 자주 찾아갔고, 그 또한 틈만 나면 뭍으로 올라와 나와 격의 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던 친숙한 사이였다.

 내가 1군단에 있다가 한국 최초의 휴전회담 대표로 개성을 출입할 때, 버크 제독 또한 나와 같은 신분인 유엔군 회담 대표 자격으로 휴전회담에 참여했다. 그래서 나와 버크는 웬만한 이야기는 흉금을 열어놓고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였다.

 나 또한 그런 그가 반가웠다. 때로는 전선을 함께 오갔던 그때의 추억을 돌이켜 보면서 그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화제는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특히 버크는 휴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휴전 다음의 상황이었다. 그는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꺼내고 있었다.

 그는 대개 이런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 “백 장군, 당신이 떠나올 때 서울은 온통 휴전 반대 데모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또한 한국의 통일을 외치면서 워싱턴 미 행정부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어요. 그래도 휴전은 곧 현실로 나타날 겁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미국 땅에 왔으니 잘 보세요.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서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휴전 스케줄을 차분히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뽑힐 때의 가장 큰 공약이 바로 한국전 휴전이었습니다. 그는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공세적인 토론에 반발은 하지 않았다. 단지 “한국인들의 정서를 미국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일반 국민 모두 국토의 분단을 바라지 않고 있어요. 워싱턴의 뜻은 알겠지만, 한국의 통일 의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라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나를 설득하는 분위기였다. 마치 내게 “아니, 그것 말고… 다른 대안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식의 설득을 하려는 태도였다. 나는 그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를 넘어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버크 또한 설득을 하면서도 시원하게 자신의 의중을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버크는 모종의 메시지를 곧 전달하려는 분위기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뭔가 강력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주제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던 버크가 급기야 이런 말을 내뱉었다.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고, 진정 어린 충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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